[영화 속 그곳] 왜 지금, 군산인가

(미디어원=정 인태기자) 영화 ‘군산:거위를 노래하다’의 한 장면. 박해일이 철길에 누워있다. 자살이라도 결심한 걸까. 빙그레 웃는 듯한 얼굴에 옆에는 문소리가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주변을 보니 조금 이상하다. 철길 옆에 집들이 1m가 조금 넘는 간격을 두고 붙어있다. 집들 사이로 철길이 생긴 걸까, 철길 옆에 집들이 들어선 걸까.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이다.

이곳은 이미 꽤나 유명세를 탔다. 철로와 집들이 붙어있는 독특한 풍경 때문에 ‘남자가 사랑할 때'(2014), ‘마더'(2009), ‘천년학'(2007), ‘홀리데이'(2005) 등 다수의 영화에 등장했다. 하지만 영화를 봤어도 철길마을을 제대로 인지한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 이색적인 풍경의 뿌리를 찾으려면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일제는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인 김제만경평야에서 거둬들인 곡물이나 현지 원료로 생산한 공산품을 군산항을 통해 수탈해갔다. 이를 위해 곳곳에 철도를 놓았다.

이곳 철로도 일제가 세운 신문제지회사의 원료와 생산품을 실어 나르기 위해 1944년에 개설됐다. 수탈기지의 역할이 끝나자 해방 이후 황무지처럼 된 이곳에 갈 곳 없는 실향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렇게 마을이 생겼다.

철길 주변에 집들이 들어섰지만 기차는 하루에 두 번씩 계속 다녔다. 앞쪽에 두 사람이 매달려 주민들에게 비켜나라고 소리치면서. 행여나 마을 주민이 키우는 강아지라도 치일까 봐 조심조심 다니던 기차도 2008년 6월 이후로는 더 이상 이 길을 지나가지 못했다.

지금 이곳은 군산으로 ‘시간 여행’을 온 사람들이 찾는 추억의 관광지가 됐다.

장률 감독은 ‘군산:거위를 노래하다’에 경암동 철길마을을 딱 한 컷 넣었지만, 왠지 그 풍경은 필자의 시선을 잡아끈다.

조선족인 장 감독은 데뷔 이후 지금껏 만든 10여편의 장편 영화 대부분에서 끈질기게 ‘경계’와 ‘이주’라는 키워드에 천착해왔다. 그는 다수의 작품에서 스스로 경험한 일인 양 이주민이나 경계에 놓인 사람들이 받는 차별과 배제를 영화의 주요 모티프(motif)로 삼았다.

그러면서 ‘경계’를 상징할만한 미장센을 영화마다 배치했다. 이 영화에서 철로는 그 어디론가 가고 싶은 마음이 늘 가닿는 곳이다.

기차는 특정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을 떠올린다. 거기서 공간은 국가나 지역일 수도 있고, 때로는 인간과 사회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무형의 경계선 내부일 수도 있다.

경계는 시간의 흐름을 가로지를 수도 있겠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 설경구가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기차 앞에서 외쳤듯이.

철로 옆에 집이 붙어있는 경암동 철길마을 풍경은 실향민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라는 역사를 몰라도 그 자체로 절박함이 묻어난다. 거주공간과 이동수단이 붙어있는 곳. 그 풍경이 주는 감성은 그래서 그 무엇보다 ‘그리움’과 ‘슬픔’이다.

군산은 혼종성(hybridity)이 뚜렷한 도시다. 대표적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가 시내 한복판에 있고, 적산가옥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가 하면, 대한제국 말기부터 이주한 화교들이 운영하는 식당도 곳곳에 있다. 미군기지가 있어 미군 문화도 공존한다.

장 감독의 작품 제목엔 지명이 많다. 중경, 이리, 두만강, 경주에 이어 이번엔 군산이다. 왜 군산인가. 답은 영화를 본 관객의 몫이겠지만, 필자의 머릿속엔 집들 사이에 붙은 철길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한국지엠 군산공장이 폐쇄되면서 군산 지역경제는 벼랑 끝에 몰렸다. 살기 어려워진 이곳을 많은 사람이 떠날지 모른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을 또 어디선가 다른 지역 사람들이 하나둘씩 채울 것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경계에 서 있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곳이 없거나 떠나지 못하는 들. 경계에 선 사람들의 마음은 오늘도 철길마을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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