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용건화백 시화] 단골 이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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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방향을 잘못 잡는 바람에 이발시간이 평소보다 좀 많이 길어졌다. 가만히 보면 많은 손님들과 이런 저런 다양한 테마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이발사들도 자신에 맞는 적절한 화제가 따로 있는 모양이다. 가령 예를 들어 위험수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정치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연예계이야기를 좋아하는 낭만파 이발사, 낚시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발사, 그런가 하면 주변잡사에 강한 이발사들이 따로 있다.

그 중 내가 드나드는 우리 동네 단골이발사는 아마도 옛날 어린 시절의 추억담에 강한 순정파 이발사인 것 같다. 탤런트나 가수 쪽의 이야기에서 보다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돌아갈 때 이야기가 물 흐르듯 끊임없다. 그 흐름엔 나의 맞장구가 끼어들 틈새가 없을 정도다.

어렸을 적 학교에서 나누어주던 배급우유가루를 타먹던 이야기며, 책보를 어깨에 두르고 논두렁길을 따라 학교로 달려가던 이야기, 뛸 때는 양철필통 속의 연필 부대끼는 소리가 요란해 대부분 연필심들이 골아 부러졌다는 이야기… 나 역시 어렸을 때 형들의 가방에서 나는 덜거덩하며 터프하게 들리던 그 소리가 꽤나 부러웠다. 당시 2학년인 나에게는 그런 필통이 없었음으로… 그 소리는 장차 내가 이르러야 할 고학년의 상징 음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뛰어놀다가 계집아이들 치마를 들춰보았다는 이야기, 어떤 아이들은 집에서 할머니가 가위로 머리를 깎아주어 머리들이 다락 논처럼 어지러웠다는 이야기… 이야기는 대충 두서 없이 이어진다.

이쯤해서 이발을 끝내도 좋을 듯한데, 아직 가위소리는 요란하다. 웬일일까? 눈을 들어 거울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려니 아니나 다를까 이 양반 계속 허공에다 대고 가위질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마저 마치기 위하여 헛 가위질로 시간을 끌고 있었다.

머리를 툭툭 털고 이발소 문을 나서려니 아침나절도 아닌데 햇살이 부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많은 동네 사람들이 장터를 오가며 ‘굿모닝!’하고 인사를 나누는 것만 같았다.

그림-프라하 성비투스 성당 23/35cm 수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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