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 그리고 사군자

방향타를 잃고 거대한 폭풍우 속에 망망대해를 헤매고 있는 대한민국호의 현실이지만, 그래도 자연의 법칙은 어김없이 우리를 가을의 한 복판으로 잠시 내려 놓는다.

작년 이때쯤 사 온 큰 국화 화분이 하나 있었다. 겨울이 되면서 꽃도 떨어지고, 가지도 말라 사라지면서, 그저 흙만 남아 있는 빈 화분으로 찬바람을 그대로 맞는 바깥 베란다 구석에 놓여 있었다. 무관심하게 일년내내 내버려뒀던 그 화분에서 어느새 줄기가 올라오고, 잎이 나더니, 시월에 접어들면서 꽃봉우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드디어 며칠전부터는 노랗게 황국(黃菊)이 만개를 했다. 자연의 섭리는 이토록 어김없는 것이다.

菊이라는 한자는 원래 艸+鞠으로 궁진(窮盡)이니 즉 이 꽃이 피고 나면 다시 더 필 꽃이 없다는 뜻이다.. 봄에 시작해서 서로의 미모를 뽐내 온 수많은 꽃들의 경연은 국화를 마지막으로 한 해의 막을 내리게 된다. 唐시인 원진의 詩 한수가 있다. 이렇게 국화가 지는 것을 보면서 한해가 지나감을 아쉬워 했다.

不是花中偏愛菊 [불시화중 편애국] 꽃 가운데 국화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此花開盡更無花 [차화개진 경무화] 이 꽃 다 지고 나면 다른 꽃이 더 없네

어디 그 뿐이랴. 수없이 많은 문인, 묵객(墨客)들이 한 해가 감을 아쉬워하면서, 이 국화를 예찬했다. 도연명의 잡시(雜詩)에서 한 구절인 “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꺾다가 문득 멀리 남산을 보니..”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우리 현대사에 걸출한 문인이셨던 노산 이은상 선생은 국화를 감상하는 방법으로 상국삼도(賞菊三到)를 說破(설파)하셨다. 첫째는 충담(沖澹)이라 하여 즉 성질이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에서 냉향(冷香)이라고 하셨고, 둘째는 청원(淸遠), 즉 형정(螢淨)한 빛깔이라 해서 마치 반딧불처럼 맑고 깨끗한 빛이라고 했다. 셋째는 貞高(정고)라 하니, 芳心(방심) 곧고 높아서 꽃같이 아름다운 마음이라 했다. 이렇게 곧고 맑은 성질 때문에 국화를 절개 있는 선비들이 주로 즐겼다는 얘기이다. 뿐만 아니라 아예 선비들의 상징이라는 四君子(사군자)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군자, 즉 매란국죽(梅蘭菊竹)을 우리는 이렇게 꼿꼿하게 절개 있는 선비들의 이상적 모습으로 얘기한다. 과연 그럴까? 사실 이는 전형적인 남성중심 유교사회의 일면일 뿐이다. 사군자, 매란국죽의 원래 의미는 “짝 없는고독한 여인의 상징”이라는 것을 아는 이 드물다. 무릇

여자를 꽃에 비유했고, 남자를 날아드는 벌, 나비에 비유했다. 그런데 이 매란국죽 네 꽃의 특징은 이 벌,나비를 멀리 한다는 얘기다.

음력2월이면 피었다 지는 매화는 벌, 나비가 나오기전에 피고 진다. 蘭(난)은 그 꽃 모양새가 대개 갈고리처럼 생겨서 벌, 나비의 침입을 스스로가 막는 구조이다. 菊花는 서리가 내리고 난 후, 즉 이미 벌, 나비가 사라진 후 피었다 지는 꽃이다. 대나무는 꽃이 잘 피지도 않지만 대나무 꽃이 피고 지면 그 대밭이 전멸하다고 했다. 그러니 이 네 꽃 모두 벌, 나비를 멀리 하는, 즉 남자를 멀리하는, 혹은 외로운 여인의 상징인 것이다.

우리 가슴 속에는 지금도 여전히 큰 대못이 하나 꽂혀 있다.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그것도 저 국화의 성질 마냥 고고(孤高)하고, 고결(高潔)한 모습의 우리 대통령을, 아니 그 이전에 그저 외롭고 가녀린 늙은 여인을 무려 1200일이 넘도록 없는 죄를 만들어 내어, 지금도 여전히 옥고(獄苦)를 치루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 많은 이들이 알게 되었다. 지난 1200일간은 지난 70년 국민들이 피땀을 흘려가면서 이룬 이 기적의 나라를 철저히 자폭 자살로 파괴해 가는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오늘도 그 과정은 진행형이다.

사군자 가운데 마지막인 대나무(竹)는 그 꽃이 수십년만(60-120년 정도)에 한번 피고 지면, 그 주변 대밭이 완전히 전멸한다고 했다. 요즘은 이 무서운 말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 이 어리석은 국민들이 마침내 대나무 꽃을 피우고 또 지게 한 게 아닌지 모르겠다. 정말 무섭다. 이 나이가 들도록, 이토록 무섭다는 느낌을 받아 보긴 처음이다.

@20201012

滄巫 송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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