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스프 감언이설(甘言利說)

8 산목처럼 살거나 집거위처럼 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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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평생 불화(不和)의 늪을 벗어날 수 없는 모양입니다. 요즘 들어, 공자님이 강조하신 화이부동(和而不同, 각기 다르면서도 잘 어울림)의 경지란 인간세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란 염이 자주 들곤 합니다. 잘나면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고, 못나면 혐오 멸시의 대상이 됩니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타인의 시선을 벗어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정말 크게 타고 나서, 남의 시선을 무시하고 살 수 있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그런 재능의 소유자라면 어느 선에서 머무르고(자제하고) 어느 선까지 행하느냐를(도전할 것인가를) 두고 늘 고민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다수의 남들과 함께 같이 흘러갈 것인가, 아니면 소수의 반대자들과 힘을 합해 물을 거스를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할 때도 많습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살기가 어려운 우리네 인생일진대, 그런 ‘선택’이 아주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 때도 허다합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처럼 자신의 인생행로가 타인들로부터의 사랑과 인정 여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우에는 그런 ‘선택’들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행여 잘못 ‘선택’이 되었을 경우에는 거의 치명적인 타격(손실)을 입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제가 잘 아는 이들 중에 정치판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두 개성이 뚜렷하고 주관도 분명한 이들입니다. 정파(政派)도 다르고 정견(政見)도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 ‘선택’에 매우 신중하다는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이른바 ‘행장(行藏)’의 묘(妙)를 잘 살립니다. 들어갈 때와 나아갈 때를 잘 분간합니다. 제도와 도덕이 자신의 편에 있을 때는 나아가지만 그것들이 자신을 멸시하거나 무시할 때는 미련 없이 들어갑니다. 저 같은 시골무사가 보기에는 ‘모험’, 아니면 ‘낙오’ 같았던 그들의 ‘선택’이 나중에는 절묘한 ‘중간(中間)에 거함’이 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장자』 외편 「산목(山木)」에 보면 그런 처세의 이치가 재미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장자가 산 속을 가다가 잎과 가지가 무성한 거목(巨木)을 보았다. 나무꾼이 그 곁에 머문 채 나무를 베려 하지 않았으므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쓸모가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장자가 말했다. “이 나무는 재목감이 안 되므로 그 천수(天壽)를 다할 수 있었던 거다.” 장자가 산을 나와 옛 친구 집에 머물렀다. 친구는 매우 반기며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거위를 잡아 대접하라고 일렀다. 아이가 “한 마리는 잘 울고 또 한 마리는 울지 못합니다. 어느 쪽을 잡을까요?” 하고 묻자 주인은 “울지 못하는 쪽을 잡아라.”고 했다. 다음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 속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님은 대체 어느 입장에 머물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그 쓸모 있음과 없음의 중간에 머물고 싶다. 쓸모 있음과 없음의 중간이란 도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므로 화를 아주 면하지는 못한다. 만약 자연의 도에 의거하여 유유히 노닌다면 그렇지 않게 된다. 영예도 비방도 없이 용이 되었다가 뱀이 되듯이 신축자재하며 때의 움직임과 함께 변화하여 한 군데에 집착되지 않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남과 화합됨을 도량으로 삼는다. 마음을 만물의 근원인 도에 노닐게 하여 만물을 뜻대로 부리되 그 만물에 사로잡히지 않으니 어찌 화를 입을 수 있겠는가! <후략>”] [『장자』 외편, 「산목(山木)」, 안동림 역주, 『莊子』() 참조]

장자(장자학파)의 가르침은 어차피 세속에서 떠날 수 없을 바에는 그때그때 ‘때에 맞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굳이 ‘하나의 법(法)’을 고집하다가는 화를 입게 되어 있다는 거지요. 산목처럼 살아야 할 때는 산목으로, 거위처럼 살아야 할 때는 거위로 처신해서 굳이 화를 입지 말고 목숨을 보전하라는 난세의 처세술로도 읽힙니다. 을의 처세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 살아도 자신의 삶에 불편이나 불이익이 없는 사람이라면 참고가 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처세술로 보기에는 너무 ‘빤한 내용’인 것 같아 이 대목의 교훈을 조금 비틀어보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이런 식으로 한 번 비틀고 싶습니다. <젊어서는 거위처럼, 늙어서는 산목처럼 살아라.> 젊어서는 있는 것 없는 것 자기 안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려고 발버둥쳐야 합니다. 계속 꽥꽥거려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한 번이라도 자기를 쳐다봐줍니다. 늙어서는 공연히 뻗대지 말고 조용히 가지나 늘어뜨리고 살 일입니다. 혹시 그늘이 필요한 이가 있으면 내 안에서 위로나 휴식을 얻고 갈 수 있도록 오래 버티며 배려하는 삶을 사는 게 상책입니다. 그 낙을 찾지 못하고 그때까지 꽥꽥거리면 누군가 와서 꼭 도끼날을 내 살에다 박아 넣습니다(가만히 있어도 간혹 못난 나무꾼들이 재미삼아 휘두르는 도끼에 늙은 살점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나무꾼들은 언젠가는 꼭 자기 발등을 찍습니다만).

사족 한 마디 : 몇 년 전에 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고급 논술반>을 운영해 본 적이 있습니다(주말마다 4시간씩 했습니다. 너무 고단해서 한 학기만 하고 끝을 냈습니다). 그때 다섯 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로스쿨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습니다. 7급 공무원 시험에도 합격을 한 것입니다. 당장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소득(所得)과 3년여의 학비와 노력, 그리고 불투명한 장래에 대한 불안이 뚜렷하게 대조가 되면서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억지 비유겠습니다만, 산목처럼 살 것인가 집거위처럼 살 것인가의 갈림길 위에 섰던 것이지요. 제게 자문을 청하길래 저는 젊어서는 거위처럼 살라고 했습니다. 젊어서는 도전의 길이 주어질 때 반드시 그 길로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청춘은 언제나 ‘길 없는 길’(김영민)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그래야 없던 길도 열린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젊어서 따져보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는 결국 도로(徒勞)에 불과한 것, 그 안에 있는 ‘계산된 미래’로는 크게 될 수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내가 예상치 못한 곳에 와 있어야 한다고, 젊어서 제대로 도전의 길을 가지 못했던 제 경우를 예로 들어서 그렇게 강조했습니다. 후일 우연히 그 로스쿨 교수님을 만나서 그 친구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주 잘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쯤은 아마 변호사 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을 줄로 압니다.

글:양선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