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과 한음”의 조선시대 명재상  이항복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난다.

사진:이항복 위성공신상 후모본-안면,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미디어원=박예슬 기자) 지혜와 기개로 임진왜란을 극복한 조선시대 명재상 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자 자상子常, 호 백사白沙)의 초상화와 천자문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나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배기동)은 11월 20일 이항복의 15대 종손 이근형(47세, 사업가) 선생으로부터 400년 넘게 종가宗家에서 간직해 온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 李恒福 扈聖功臣敎書)’와 ‘이항복 호성공신상 후모본(李恒福 扈聖功臣像 後模本)’, ‘이항복필 천자문(李恒福筆 千字文)’등 17점을 기증받았다고 밝혔다.

이항복의 14대 종부 조병희趙丙熙 여사(74세)는 “백사 할아버지 초상화를 지금까지 모시고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을 하니 마음이 편안하고 좋다. 박물관에서 널리 알려주시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종가를 대표해 기증한 종손 이근형도 “백사 할아버지 유품이 국가 기관에 보존되어 다음 세대에도 잘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다.”며 바램을 나타냈다.

사진: 이항복 호성공신교서,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명문가 경주 이씨 백사공파 종가의 보물 최초 공개
이번에 기증된 경주慶州 이씨 백사공파白沙公派 종가宗家 전래품傳來品은 이항복이 공신功臣으로 임명될 때 받은 문서인 ‘호성공신 교서(扈聖功臣敎書)’와 초상화, 이항복이 손자를 위해 직접 쓴 ‘천자문’과 친필 자료 등 이항복 관련 유물 6점, 증손 이세필(李世弼 1642-1718) 초상화 1점 및 다른 후손의 교지 등 문서류 5점, 초상화 함 및 보자기 5점이다.

이 중 ‘호성공신 교서’는 유일하게 전하는 호성공신 1등 교서로 보물급 문화재이며, 공신 초상화와 함께 조선 17세기 공신 제도 연구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천자문’은 손으로 쓴 천자문 중에서 가장 시기가 이른 천자문으로 가치가 매우 높다.

사진: 이항복 위성공신상 후모본,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큰 공을 세운 이항복에 하사한 공신 임명 문서와 초상화
이항복은 ‘오성과 한음’ 민간설화의 영향으로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과 관련된 일화와 해학적인 면모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항복이 이덕형과 교제를 시작한 것은 23세 부터 였으며, 두 재상은 나라를 이끌어 가는 정치적 동료였다. 이항복은 실무능력이 탁월한 관료학자로 당색에 치우치지 않고 나라의 안위를 생각한 진정한 재상으로 학계에서 평가받고 있다.

이항복은 25세인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급제 후 39년 동안 관직 생활을 했다. 9급 관리에서 20년 만에 최고 관직인 영의정까지 오를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다. 37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작인 정3품 도승지(都承旨)로서 선조를 의주(義州)까지 모시면서 시의적절한 판단으로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기도 했다. 이항복은 정유재란까지 5차례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안으로는 국방을 책임지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을 전담하는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전란이 수습된 1599년(선조 32)에는 정1품 공신에게 주어지는 작호를 받아 오성부원군에 봉해졌다. 49세인 1604년(선조 37)에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모신 공으로 정곤수(鄭崑壽 1538-1602)와 함께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임명되어 ”성공신 교서>를 받았다. 교서란 국왕이 공신에게 주는 가장 권위 있는 문서로 공신호功臣號, 공적, 특권(공신 초상화, 품계, 토지·노비·은자)과 공신 명단이 적혀 있다. 이 ‘호성공신 교서’에 이항복의 공적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충성스럽고 건실하게 나(선조)를 잘 호위하며 엎어지며 달아나느라 온갖 고생을 고루 맛보았다. 시종 어려움과 험난한 것을 겪은 것이 어느 누가 卿의 어질고 수고한 것을 넘을 수 있겠는가(忠勤疇衛予於顚越備嘗終始艱險孰逾鄕之賢勞).”

“대사마大司馬(병조판서)에 발탁되어 홀로 수년간이나 그 책임을 맡고 있어서 사람들이 든든히 믿고 마음을 차츰 떨치게 하여 조정에서도 그에 의지하며 소중히 여겼다(擢置大司馬獨任幾務者數年人意恃而差 强朝廷倚以爲重).”

이항복은 호성공신을 포함해서 5차례 공신에 임명되었다. 앞서 35세인 1590년(선조 22) 평난공신平難功臣(정여립의 난 처리) 3등에, 1613년(광해군 5)에는 위성공신衛聖功臣(임진왜란 때 광해군 호종) 1등, 익사공신翼社功臣(임해군 역모 처리) 2등, 형난공신亨難功臣(김직재 옥사 처리) 2등에 임명되었다.
공신에게 주는 혜택으로 나라에서 초상화를 하사하는데, 공신 초상화는 가문의 영광으로 후손들이 귀하게 보존했다. 초상화가 낡으면, 베껴 그려서 후모본後模本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보존하고 계승했다. 이번에 기증된 이항복 초상화 2점 모두 1604년 호성공신 초상과 1613년 위성공신 초상을 18세기에 모사하여 보존한 것이다. 두 초상화에는 원본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으나, 얼굴이나 복식에 명암을 표현하는 등 18세기 초상화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위성공신상 후모본’은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이항복 초상화 초본’과 얼굴 표현이 유사하여, 이 초상화 초본이 이항복 58세 때인 1613년 위성공신衛聖功臣이 되었을 때 그려진 초상화의 초본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번 기증이 성사되는데 크게 기여한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 두 초상화 모두 후모본이나 이항복의 국란을 극복한 기개와 영웅적 면모가 잘 표현된 수작”이라고 평했다.

 

사진: 이항복필 천자문, 제공:국립중앙박물관

이항복이 자손 교육을 위해 쓴 ‘천자문’과 ‘백서선생수서제병진적첩’

이항복이 자손 교육을 위해 손수 쓴 ‘천자문’과 ‘백사선생수서제병진적첩(白沙先生手書祭屛眞蹟帖)’에서 이항복 친필 글씨를 확인할 수 있다. ‘천자문’은 이항복 52세인 1607년(선조 40) 여섯 살 손자인 이시중李時中(1602-1657, 이항복의 장남인 성남의 장자)에게 손수 써 준 것이다. 그는 천자문을 다 쓰고 손자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남겼다.

“정미년(1607, 52세) 4월에 손자 시중時中에게 써준다. 오십 먹은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뤄서 이 노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丁未首夏 書與孫兒時中. 五十老人 揮汗忍苦 毋擲牝以孤是意).”

굵고 단정한 해서체로 정성을 들여 쓴 이 ‘천자문’는 현재 전해지는 손으로 쓴 천자문 중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것으로 가치가 매우 높다.

사진: 이항복필 백사선생수서제병진적첩, 제공:국립중앙박물관

‘백사선생수서제병진적첩白沙先生手書祭屛眞蹟帖’은 이항복이 유교 경전 󰡔예기禮記󰡕 중 제사와 관련된 「제의祭義」·「제통祭統」·「예기禮器」편을 써서 병풍으로 만든 것을 200여 년 뒤 9대손으로 고종高宗 때 영의정을 역임한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첩으로 만든 것이다.

이항복은 이론적인 탐구보다는 실천을 중시한 인물이었다. 그는 후손들이 제사를 지낼 때, 절차가 아닌 제사의 근본을 깨우치기 바라는 마음에서 직접 글을 써서 병풍으로 제작했다. 당시 유행한 조선화된 송설체松雪體를 토대로 근골筋骨을 살려 쓰는 이항복 서체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위와 같이 이항복 종가 전래품은 후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보존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현대에 와서도 이어졌는데, 한국전쟁 때는 전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피난가면서 모시고 다녔다. 평소에는 정기적으로 초상화나 글씨를 햇볕과 바람에 말리는 포쇄(曝曬)를 하며 보관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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