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기행] 시마즈다움(島津らしさ)의 극치, 스테가마리(捨て奸 すてがまり)

2027

(미디어원=박상후 칼럼니스트) 일본역사상 가장 유명하면서 천하이분(天下二分)의 막을 내리게 한 장면은 1600년의 세키가하라(関ヶ原の戦い)전투다. 이시다미쯔나리(石田三成)가 이끄는 서군은 토쿠가와이에야스의 동군과 몇시간째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하지만 오후들어 코바야카와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가 동군편에 붙는 바람에 전세가 기울어졌다. 이시다미쯔나리와 고니시유키나가, 우키다히데이에의 전열이 붕괴되고 서군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이 때 서군에 가담했던 사쓰마의 다이묘(大名)이며 시마즈가의 17대 당주 시마즈요시히로(島津義弘)의 1,500병력은 8 만명이나 되는 적에 고립된다. 시마즈는 과감한 적중돌파를 결심하는데 이때 부하들이 장렬하게 목숨을 버리고 주군의 퇴로를 확보하는 전투방법인 스테가마리(捨て奸 すてがまり)가 등장한다. 요시히로의 병력이 전투에서 상당수 전사하고 300명 정도가 남았을 때였다.

전장에서 최후까지 후미에 남는 부대를 신가리 殿軍(しんがり)라고 하는데 이들이 스테가마 전법을 편 것이다. 스테가마리(捨て奸)는 보통 자젠진(座禅陣)이라고도 하는데 ‘앉아쏴’ 자세로 한 무리의 신가리가 적장을 화승총으로 저격한 뒤 창을 들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이다. 십중십사(十中十死)라고 하는 스테가마리는 한조가 전사하면 다음조가 나서서 항복이나 자결도 하지 않고 죽을 때 까지 싸우는 것이다.

“주군이 무사히 돌아가기만 한다면 우리의 승리다. 병사들이 죽는 것은 바로 이때다.” 사쓰마의 군사들은 사나운 매에 비유할 정도로 용감무쌍해 사쯔마하야토(薩摩隼人さつまはやと)라고도 한다.

시마즈요시히로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한 스테가마리(捨て奸)에 동원된 병력은 지명 받은 이보다 자원한 인력이 많았다고 한다. 귀신같은 시마즈(鬼島津)라는 별명의 시마즈요시히로는 23살 때 선봉에 서서 가모(蒲生)성을 공격하면다 갑옷에 화살 다섯발을 맞고도 결사적으로 싸울 정도로 용맹했지만, 전쟁터에서는 가신의 상처를 보듬고 음식물을 나눠주는 등 자애심이 충만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부하들이 목숨을 버릴 정도로 충성한 것은 이 때문인데, 나중에 사이고 다카모리도 시마즈의 인품을 존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테가마리(捨て奸)전법을 사용하면서 조카인 시마즈토요히사와 쬬쥬인 모리아츠(長寿院 盛淳ちょうじゅいん もりあつ)등 수많은 가신과 무장들이 목숨을 잃었다. 토요히사는 적을 속이기 위해 요시히로의 겉옷 진바오리(陣羽織)를 걸쳤고, 모리아츠는 “내가 요시히로다”라고 외치며 적의 시선을 끌며 분전하다 전사했다.

도쿠가와의 동군에 소속된 마스히라타다요시(松平忠吉) 이이나오마사(井伊直政) 혼다타다카츠(本多忠勝)등이 시마즈요시히로를 추격했지만 타다요시와 나오마사가 스테가마리(捨て奸)의 화승총에 맞거나 낙마해 중상을 입어 도쿠가와는 추격중지를 명령했다.
시마즈요시히로는 탈출에 성공해 이세와 오사카를 경유해 살아남은 80명과 사쓰마로 돌아간다.
세키가하라전투에서 토쿠가와의 반대편에 섰지만 시마즈 가문은 막부로부터 감봉(減封) 처분을 받지 않았다. 토쿠가와는 요시히로군이 적이기는 했지만 그 용맹과 과감함을 높이 산 것이다. 토쿠가와측에서는 ‘시마즈를 적으로 돌리면 재미가 없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시마즈요시히로는 임진왜란때 조선을 침략한 왜장(倭將)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운데 임진왜란에 가장 늦게 출병한 그는 정유재란 당시 사천성 전투에서 조명(朝明)연합군을 크게 격파하고 조선인과 명군의 귀와 코를 잘라 전리품으로 본국에 보낸 것으로 악명이 높다. 사천성 전투에서 승리한 시마즈는 순천지역에 고립된 왜군을 구출하기 위해 수군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이순신장군에게 노량해전에서 대패한다.

시마즈요시히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문물을 눈여겨보고 장점이다 싶은 것은 높이 평가하고 적극 도입했다. 용맹한 무장이기는 했지만 사물을 보는 심미안(審美眼)도 있었다. 조선에서 돌을 균일하게 가공해 빈틈없는 돌담을 쌓았으며 10킬로미터에 걸친 한양 도성의 축조에 감탄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에만 있었던 꽃에 흥미를 느껴 화분을 사쓰마에 보냈고 이 덕분에 가고시마 선암원(仙巖園)에 조선원산지의 꽃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 조선의 도자기 기술에 감동해 대거 도공을 가고시마에 끌고 갔고 이것이 사쓰마야키의 시초가 됐다.

시마즈요시히로는 토요토미히데요시편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은 아니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반대편인 이시다미쯔나리편에 서게 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키가하라전투에서 토쿠가와의 군대가 몇 백미터 앞에서 이동하는 것을 보고 요시히로는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측근들이 시마즈가문의 영속을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목숨을 버린 스테가마리(捨て奸)로 그의 퇴로를 열어준 것이었다.

“시마즈에 암군은 없다(島津に暗君なし)”는 말처럼 시마즈가는 당주들이 뛰어나 가마쿠라부터 메이지까지 사쓰마의 영주를 통치한, 드물게 오래 살아남은 명문가다. 특히 스스로의 용맹함에 더해 주군을 위해 목숨을 거는 부하들의 충성심까지 이끌어내는 시마즈요시히로의 리더쉽으로 시마즈다움(島津らしさ)이란 용어도 있다.

스테가마리(捨て奸 すてがまり)의 전설을 남긴 시마즈요시히로가 타계하면서 남긴 시 역시 아주 절창이다.

春秋の 花も紅葉も とどまらず 人も空(むな)しき 関路なりけり
봄가을의 꽃과 단풍도 머무르지 않고 사람도 덧없는 세키가하라의 퇴각로 인 듯.

글: 박상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