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역사 기행을 시작하면서 그 첫걸음을 사직단에 놓기로 한 것은 일제 식민통치에 놓이기 이전까지 , 종묘와 함께 국가와 사회에 가장 중요한 곳이었던 사직단을 조금 더 조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 년 한양으로 천도를 하고 1395 년 ( 태조 4 년 ) 종묘와 함께 사직단을 짓는다 . 정월부터 시작된 공사는 4 월에 완성되었다 .
태조 이성계가 농본주의 사회인 조선을 개국하면서 국태민안 ( 國泰民安 ) 을 기리는 사직대례를 지냄으로써 국민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는 대화합의 장을 만들었다는 것에서 역사 문화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사직단이라 함은 농경사회의 근본인 땅과 곡물을 관장하는 , 국사신 ( 國社神 ) 과 국직신 ( 國稷神 ) 의 두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단을 쌓고 봉사하는 곳으로 종묘와 더불어 조선왕조의 근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 『 삼국사기 』 와 『 문헌비고 ( 文獻備考 ) 』 에 고구려는 391 년 ( 고국양왕 9) 에 국사 ( 國社 ) 를 세웠고 , 신라는 783 년 ( 선덕왕 4) 에 사직단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
고려시대의 사직단에 대해서는 『 고려사 』 를 통하여 991 년 ( 성종 10) 처음으로 도성인 개경 서쪽에 사직단을 만들었고 , 그 후 사직단을 수축하거나 사직단에서 행한 제례를 정비한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
사직단은 동서쪽에 두 개를 나란히 만들어 동쪽에는 토지신 [ 社 ] 에게 제사지내는 사단 ( 社壇 ) 을 , 서쪽에는 곡식신 [ 稷 ] 에게 제사지내는 직단 ( 稷壇 ) 을 배치하였다 . 사직단은 한양도성 서쪽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의 한 줄기가 내려온 지형과 조화되도록 조성되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남북을 향하지 않고 약간 동남쪽으로 틀어져 있는데 , 이는 도성 쪽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
1414 년 ( 태종 14) 4 월에 단 주위에 담을 둘렀으며 , 담 안에는 신실 ( 神室 ) 과 신문을 세웠다 . 사직단을 관장하는 사직서는 1426 년 ( 세종 8) 6 월에 담장 밖 북쪽에 설치하였다 . 사직단 제향인 사직제는 매년 중춘 (2 월 )· 중추 (8 월 )· 납일 ( 臘日 ) 에 세 차례 거행하였으며 , 이외에도 가뭄 때에는 기우제를 행하는 등 각종 고제 ( 告祭 ) 가 있었다 .
그로부터 600년이 지난 지금의 사직단은 초라하다. 사직단의 제사는 일제 강점기에 통감부가 1908 년 칙령으로 향사에 관한 시설을 대부분 철폐시킴에 따라 폐지되었다 . 1911 년에는 사직서의 건물과 사직단 일대의 대지가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 이어 사직단은 경성부에 이관되어 1922 년에 사직단 주변에 도로를 내고 공원을 조성하면서 부속 건물들이 철거되었고 , 1924 년 공원으로 개설되었다가 1940 년 도시 공원이 되었다 . 이로써 인왕산 자락에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던 사직단은 그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
사직단의 부속 건물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안향청 ( 安香廳 ) 과 정문뿐이다 . 안향청은 재궁으로 쓰인 사직서의 중심 건물로 숙종 때부터 안향청이라 불렸으며 사직단 정문은 사직단 신문이다 .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뒤 재건된 것으로 , 정면 3 칸 , 측면 2 칸으로 단층의 맞배지붕이다 .
조선시대에 경복궁 앞 육조거리 우측 첫 번째에 자리잡은 예조 옆길을 따라 서쪽으로 곧장 가면 인왕산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사직단은
해방 후 1962 년에는 도시 확장으로 정문이 뒤로 이건되었다. , 1970 년대에는 북쪽에 종로도서관과 동사무소 , 파출소가 , 서쪽에 수영장 등이 건립되었고 사직동 주민센터까지 들어서면서 주변 환경이 다시 크게 훼손되었다 .
지난해 4월29일 ‘사직단 복원 촉구 결의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사직단은 2027년까지 단계별로 복원하여 원형을 되찾게 된다고 한다. 복원 후에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신청할 계획이다.
현재 복원에 앞서 종로도서관 앞에 위치한 전사청 자리의 유물발굴 및 조사를 위한 준비가 진행 중이다.
경복궁의 좌우에 조선왕조에서 가장 신성시 되었던 종묘와 사직단이 있었으나 오늘날 두 곳의 위상은 천양지차이다. 종묘는 사적 제 125호로 지정되어 있고 정전과 영녕전은 국보와 보물이며 종묘제례악과 종묘제례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전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다.
종묘와 사직단 중 어느 것의 가치가 더 높음을 견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나 종묘가 왕조의 제례를 위한 것이라면 사직은 국가의 근본인 국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이니 오늘날의 가치로 판단한다면 사직단에 더욱 무게가 실릴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일제에 의해 일개 공원으로 격하되어 100년 가까운 세월을 흘려 온 사직단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이상한 노릇이다.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창경원은 놀이터로 사직단은 도시공원으로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천명한 환구단은 호텔로 만들어버린 그들의 행위는 결코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다.
왕조가 무너지고 일제강점기와 격동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사직단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들의 삶의 현장이 되었다. 도서관이 들어서고 주민센터가 생기고 파출소가 자리잡았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600년 전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60년 삶의 터전을 없에는 것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천년이 지난 후에는 시간의 길고 짧음이 가치의 척도가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복원 사업과 관련한 가장 중요한 절차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얻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단순한 사적의 복원에 그칠 것이 아니라 문화와 가치의 복원 역시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직대제는 계승발전되어 1000년 후에도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국민대축제로 남아 있어야 한다.
사직단을 나서니 비 개인 오후 인왕산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한마음으로 화합하여 막힘 없는 복원 사업으로 사직단이 인왕산 아래 가장 빛이 나는 곳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울 기행 첫여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