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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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게 있어 학자들은 ‘언제나 차가운 그림자 속에 차갑게 앉아 있는 방관자들이었고 그들은 도대체가 태양이 계단을 내려 쪼이는 곳에는 앉지 않으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말은 무거운 자들을 위해 만들어졌고 가벼운 자들에게는 모든 말이 다 거짓말’일 뿐이기도 했지요. 어느 날 ‘즐거운 지혜’라는 책을 쓰고 갑자기 생각나서 쓴 짜라투스트라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플라톤 이후의 거의 모든 철학을 죽였다는, 흔히 도대체가 알쏭달쏭 하다고 말하는 니체를 꺼낸 것은, 지금 이 나라의 흐름을 도대체 아둔한 저로서는 니체처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촛불시민으로 불리는 정신문화에 의해 탄생한 정부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접어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다 비슷합니다. 성향이 다르다고 해서 특별하게 포장된 상품이 나온다는 기대는 그저 기대에 불과한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라는 언론의 프레임은 단지 수사에 불과하지요. 이 나라에서 <江南>이라는 지명은 정경사문을 망라하고 기득권(旣得權)의 상징입니다. 기득권은 이미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새롭게 차지한 것이기도 해요. 그런 의미로 강남의 우파든 좌파든 그들 모두는 지키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이고 건설적인 의미에서의 기득권은 목숨 걸고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강남우파 강남좌파들 비난하지 마세요. 나 도한 그들의 입장이 되면 그렇게 살게 되는 겁니다. 자기 것 지키려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짜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어요. ‘예전에는 한두 사람씩 미쳤으나 지금은 온 세상이 미쳤다’고. 평가에 따라 천재와 광인(狂人)의 사이를 들락거리는 니체의 시절에도 이렇게 생각했으니 니체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면 어떨까요? 그가 조로아스터의 입을 빌려 그렇게 말했던 대상인 시장의 민중들은 결국 생각 없이 사는 우리들인 것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고 누구나 말하지만 니체를 알리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 읽어 본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는지요.

읽는 분들의 성향이나 사상에 따라서는 그가 생각하여 기술한 단상들은 그저 횡설수설일 수도 있고 명작일 수도 있지요. [신곡]이나 [파우스트]의 격조와는 분명 다르니까요. 그러나 저도 가끔 머리맡에 놓고 보다마는 짜라투스트라의 말씀에 정당성은 인정합니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분명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입니다. 다만 가공되지 않고 얇은 밧줄이라 쉽게 끊어지거나 튕겨 나간다는 단점이 있지요. 과거든 현재든 인간이라는 동물은 문제투성이입니다.

단테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인간상으로 연옥을 마련했지만 니체는 신을 부정했으므로 천국과 지옥도 없으니 니체식으로 표현하면 문제투성이 인간이라도 죽음 다음은 없는 거지요. 인간에게 있는 결함과 두려움이 종교를 탄생시켰다면 종교는 아마 영속할 겁니다. 빅뱅이든 창조든 인간의 탄생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욕망의 엘리베이터를 타기위한 아비규환의 세계를 규명하지 못하는 한 말입니다. 종교인들이 더 부정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사람은 다 다르듯이 종교인들도 다 달라요. 그리고 그들도 종교라는 영적언어를 빼면 다 인간이고요.

‘민족의 명절’이라는 수사는 개발도상국이던 시절까지의 언어였는지도 모릅니다. 고향을 찾아 조상의 인덕을 기리며 햇쌀로 만든 송편을 나누는 대신 선대가 만든 풍요(?)를 누리며 외국여행을 즐기는 가족이 더 많아지니 말입니다. 3,000년 중추절의 역사가 불과 400년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칠면조에게도 안녕(사요나라)하면 좀 쑥스럽지만 대세는 그르칠 수가 없는 것이니 인정합니다. 니체는 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신을 인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회색인(灰色人)의 입장이 쓸쓸할 따름이지요.

“정신의 가난을 따르자니 존재의 의미가 사라지고, 물질의 가난을 선택하자니 당장 현실의 통증이 폐부를 찌르지요. 일상은 도피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초인(超人)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일상의 고뇌를 존중합니다. 노트북을 닫고 일어서는 발길에 가을이 어느새 낮은 포복으로 다가와 신발 끈을 동여매주고 있습니다.”

글: 박철민/작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