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엔들 잊히리오 (한계령∼조침령 23.1㎞)


인제에서 동쪽으로 한계 삼거리를 거쳐 용대리에 진입하면 진부령과 미시령을 만난다. 여기서 좌측 길을 택하면 진부령을 넘어 강원도 고성군에 이르고 우측길은 속초로 가는 미시령이다. 한계령은 한계 삼거리에서 양양으로 향하는 남동쪽 길이다.
대관령이나 미시령 등 이름높은 고갯길은 이제 터널을 이용하면 되기 때문에 강원도의 진면목을 보기 어렵다. 이에 반해 한계령은 여전히 고갯길을 오르며 설악을 맘껏 감상할 수 있다.
한계리를 지나자마자 설악의 비경이 펼쳐진다. 내설악 광장에서 옥녀탕을 지나 장수대에 서면 해발 1519m의 가리봉이 보인다. 뒤로 돌아서면 대승폭포가 있는 대승령이 버티고 있다. 설악산 봉우리 속에 폭 파묻힌 한계령에 서니 자연이 빚은 예술품을 감상하면 고개를 오르며 점점 거칠어진 호흡도 어느 결엔가 사라지고 만다.
설악산국립공원 장수분소 옆으로는 한계사지로 통하는 길이 있다. 오랫동안 관리를 안 했는지 팻말조차 보이지 않는다.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647)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던 절인데 다섯 차례에 걸친 화재로 현재는 절의 대부분이 백담사로 옮겨지고, 터만 남았다.
다시 길을 나서자 점점 더 가파르고 험난해진다. 양양으로 넘어가는 길목 한계령 정상 바로 아래쪽에 한계령휴게소가 자리 잡았다. 휴게소에는 거센 바람이 분다. 바람 앞에서 실눈을 뜨고 풍경을 살펴보니 설악산의 장엄한 절경이 눈에 박힌다. 휴게소 건물은 자연과 잘 어울리도록 설계돼 오가는 이의 시선을 거스르지 않는다. 1982년에는 한국건축가협회 대상을 수상했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에도 한계령휴게소가 붐비는 이유를 알 만하다.

다섯 빛깔 매력, 오색령
감동적인 한계령을 지나는 길은 못내 아쉽다. 사랑하는 이와 마주치곤 이내 헤어져야 하는 마음과 같다. 이곳이 그저 지나치는 여정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 가슴 한 켠에 서리가 진다.
남설악의 중심인 오색지구까지 아슬아슬 가파른 경사다. 내려가는 굽이마다 눈은 즐겁고 마음은 환해진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함경도와 강원도의 경계인 철령, 그 아래 추지령, 금강산 연수령, 설악산 오색령, 그 밑의 대관령과 백봉령을 강원도의 이름난 여섯 고개로 꼽았다. 그 중 한계령의 옛 이름인 오색령을 최고라 칭했다는 대목은 그 누구라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한계령의 옛 이름이라는 오색령은 그 명칭처럼 오색찬란한 시각적 효과를 이뤄낸다. 하얀 눈으로 뒤덮힌 겨울, 푸른 녹음을 자랑하는 여름, 이름모를 들꽃이 만연한 봄 그리고 단풍으로 물든 지금의 가을까지 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오색령의 자랑이다.
지금의 한계령은 1968년 육군 공병단에서 44번 국도 공사를 시작해 만들어졌다.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안고 피눈물을 흘리며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때는 퇴각하는 거란군을 김취려 장군이 뒤쫓아 이 골짜기에서 섬멸했다고도 전해진다. 아름다운 가락으로 유명한 노래 한계령은 가수 하덕규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설악산에서 위로를 얻고 지은 것이란다.
아찔하지만 수려하고, 높지만 깊은 한계령. 눈물과 위로를 함께 건네는 그 길에 서면 청아한 다섯 빛깔 매력에 젖어든다.

종주 그 두 번째 코스
한계령은 양양군과 인제군의 경계로 인제군 북면 한계리의 지명을 따 이름 붙여진 곳이다.
등산객의 입산을 막기 위해 쳐놓은 철망펜스 끝으로 등산객들이 다닌 흔적이 보인다. 대간을 들어서면 길은 이내 가파르고 험한 암석으로 된 구릉을 만나게 된다. 점봉산 구간은 거의 흙산이지만 이 부분이 유일한 암릉으로 밧줄을 잡고 통과해야 한다. 암릉구간 전망대에서는 주전골과 칠형제봉 그리고 필례약수쪽의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계속 대간을 따라 이어지는 산죽을 지나다보면 왼편으로 십이담 계곡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보이고, 오르막으로 진행하면 망대암산에 도착한다. 전설에 의하면 도적들이 망을 보던 곳이라 한다. 망대암에서는 대청과 끝청, 서북주릉의 모습과 오색마을 전경이 무척 아름답게 펼쳐진다.
봉산 조금 못미쳐 주목을 따라 왼편으로 5분정도 가면 샘터가 있어 산행인들의 목을 축여준다. 우편으로는 둥근 산이라는 뜻의 ‘덤붕’에서 한자화하면서 점봉산이 보인다. 점봉산 남쪽으로 풍력발전소와 구룡령, 약수산이 보이고, 서북쪽으로 곰배령과 강선리도 한눈에 보인다. 건너다보이는 북쪽엔 설악의 대청과 서북주릉이 환히 보이고, 귀둔리와 주억봉, 그리고 오색마을과 동해바다가 걸리는 것 없이 조망된다. 현재 점봉산은 희귀 동식물보호구역으로 지정돼 2026년까지 통제되고 있다.
점봉산에서 1km 정도 가파른 내리막 돌길을 지나면 홍포수막에 도달하게 되는데 겨울바람도 피할 수 있는 고개가 있으며 웬만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터까지 있다.
단목령의 단목(檀木)은 박달나무를 칭하는 것으로 박달령이라고도 불리는데 박달나무가 많아 생긴 이름일 것이다. 단목령을 지나니 물푸레나무숲이 일행을 맞이한다. 숲 사이로 보이는 조침령 길이 산행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재를 넘던 새도 지쳐 오늘을 자고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