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운림산방, 선비 화가의 예술혼이 깃든 곳

[미디어원=박예슬 기자]운림산방은 조선 후기의 문관이며 남종 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련 ( 許鍊 ) 이 49 세에 낙향하여 84 세 작고할 때까지 기거하며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다 . 소치는 추사 김정희 ( 金正喜 ) 의 제자로 글 , 그림 , 글씨에 모두 능하여 삼절 ( 三絶 ) 이라 불렸으며 스승을 따라 추사체를 쓰기도 했다 . ‘ 하경산수도 ’ 등의 작품이 있다 .

운림산방은 첨찰산을 깃봉으로 수 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연무가 운림 ( 雲林 ) 을 이루었을 것이고 , ‘ 연화부 ‘ 를 지었던 소치의 사상으로도 운림 ( 雲林 ) 이라는 당호 ( 堂呼 ) 가 걸 맞았을 것이다 .

운림산방은 첨찰산을 깃봉으로 수 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연무가 운림 ( 雲林 ) 을 이루었을 것이고 , ‘ 연화부 ‘ 를 지었던 소치의 사상으로도 운림 ( 雲林 ) 이라는 당호 ( 堂呼 ) 가 걸 맞았을 것이다 .

이곳에서 소치 ( 小痴 ) 는 미산 ( 米山 ) 허형을 낳았고 미산이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의제 허백련이 미산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익힌 곳이기도 하다 . 이와같이 유서깊은 운림산방은 소치 ( 小痴 ) – 미산 ( 米山 ) – 남농 ( 南農 ) – 임전 ( 林田 ) 등 4 대에 걸쳐 전통 남화를 이어준 한국 남화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 전통남화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운림산방은 조선조 남화의 대가인 소치 ( 小痴 ) 허유 ( 維 ) 가 말년에 거처하던 화실의 당호로 일명 ‘ 운림각 ‘ 이라고 한다 .

소치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호를 붙여준 것이며 젊었을때는 련 ( 鍊 ) 이라 했고 자는 마힐 ( 痲詰 ) 이다 . 운림산방 , 쌍계사 , 상록수림이 한데 어우러진 이곳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 운림산방에서 약 150m 를 오르면 1995 년 8 월 15 일에 세워진 진도아리랑비가 아담하게 서있다 .

소치는 1808 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임의 5 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나 1893 년 86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소치는 어려서 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 28 세 때부터 두륜산방 ( 현 , 해남 대흥사 ) 의 초의대사 ( 草衣大師 : 張意恂 ) 밑에서 공제 윤두서의 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여 33 세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하게된다 .

비록 낙도에서 태어났으나 천부적인 재질과 강한 의지로 시 ( 詩 ), 서 ( 書 ), 화 ( 畵 ) 에 능하여 40 세 되던 1847 년 7 월 낙선제에서 헌종을 뵐 수가 있었고 헌종이 쓰는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흥선대원군 , 권돈인 , 민영익 , 정학연 등을 비롯하여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

1856 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첨찰산 아래 쌍계사 남쪽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

운림산방 앞에 있는 연못은 한면이 35m 가량되며 , 그 중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둥근 섬이 있고 여기에는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있다 .

소치가 서화에 뛰어나 민영익은 ‘ 묵신 ( 墨神 )’ 이라 했으며 정문조는 여기에 시를 더하여 삼절 ( 三節 ) 이라 하였고 , 김정희는 중국 원나라 4 대화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을 ‘ 대치 ( 大痴 )’ 라 했는데 그와 견줄만 하다고 소치 ( 小痴 ) 라 했다고 한다 .

여행정보
자가용 이용시 해남 → 진도 방면 18 번 국도 → 진도읍내 초입에 두 갈래길 → 좌측 우회도로로 터미널 신호등사거리 → 왼쪽 3 번 군도로 따라 의신방면 (2.3km) 가면 길 좌측에 4 번 군도로 군도로 초입 왼쪽에는 표지판과 함께 온왕묘로 가는 작은 산길이 있음 ) → (3.3km) → 운림산방앞 주차장

지역내 대중교통 진도읍 – 사천리 /4 회 /15 분 소요 (5.6km)

자료제공: 진도군청 문화관광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