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統酒造百年史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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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統酒造百年史①
우리 기록이 전하는 삼국시대의 술

朴 寬 遠 <배다리술박물관 관장>

우리 선 조들이 마신 술과 관련된 사실을 처음으로 기록한 우리나라 문헌은「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大武神王) 11년의 기록이고, 백제 본기 다루왕(多婁王) 11년의 기록이다. 신라는 신라 본기 유리왕 9년과 지마왕(서기 112~134년) 조에 술에 관한 재미있는 기록이 등장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 11년(서기 28년)조에는 ‘연못에 있는 잉어를 잡아 수초로 싸고 맛있는 술을 함께 보내어 군사에게 먹도록 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합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당시 고구려는 한(漢)나라 요동 태수의 침공을 받아 위나암 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하고 있었고, 한나라 군사는 성안에 물이 없을 것이라 짐작하고 오랫동안 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 때 고구려의 신하 을두지(乙豆支)는 성안에 물이 얼마든지 있어 계속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성밖의 적에게 알려 포위를 풀게 하기 위한 계책으로 술과 산 잉어를 수초에 싸서 적에게 보내자는 계책을 왕에게 아뢰었고, 왕은 을두지의 계책을 실행에 옮겨 한나라 군사가 포위망을 풀고 철수케 했다는 기록이다.
고구려의 이 기록보다 10년 후인 백제 다루왕 11년조에도 역시 술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1년 가을, 곡식이 잘 여물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의 술 빚는 것을 금하였다.’
다루왕 11년 곡식이 잘 여물지 않아 흉작이었으므로 왕이 백성들의 술 빚어 마시는 것을 금하였다는 기록이다. 이는 당시 백제에서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 평소 술을 빚어 마시는 것이 거의 일반화되어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우리 역사상 최초의 금주령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 후 백제는 술 빚는 방법을 일본에 전해 주었다. 일본 최초의 역사책인 『고사기(古事記)』에는 응신천황(應神天皇) 때 백제 사람 인번(仁番)이 일본에 건너와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일본사람들은 그를 일본의 주신(酒神)으로 받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응신천황은 그가 빚은 술을 마시고 흥에 겨워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수수코리(仁番의 일본 이름)가 빚어준 술에 내가 취했네.
마음을 달래주는 술, 웃음을 주는 술에 내가 취했네”
신라의 경우는 오늘날까지 ‘추석’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가위(嘉排)에 얽힌 이야기가 유명하다. 『삼국사기』유리왕 9년(서기 33년)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왕은, 6부를 3부씨 두 패로 가르고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3부 한 패의 여자들로 이루어진 붕당을 거느리고 7월 16일부터 날마다 대부의 뜰에 모여 밤늦게까지 길쌈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 달이 되는 8월 15일에 그 동안의 실적을 비교 판정했다. 실적이 떨어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먹으면서 모두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며 즐겼는데 이 행사를 가위(嘉排)라 하였다’
이는 가위날에는 여자들도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는 기록이며, 먼 옛날 신라 때부터 우리 민족은 여자도 남자처럼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것을 기록으로 전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위 행사는 고려와 조선을 거쳐오면서 매년 추수감사절 행사로 이어져 우리 고유명절 추석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 후 80년이 지난 지마니사금 원년(서기 112년)조에 한 주연(酒宴)이 왕과 왕비가 결혼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은 사파왕의 적자로서 어머니는 사성부인이요 비는 김씨 애례부인으로 갈문왕 마제의 딸이다. 전에 파사왕이 유찬의 연못 근처에서 사냥을 했는데 태자 지마도 동행하였다. 사냥이 끝난 뒤 한지부를 지나는데 이찬(伊湌) 허루(許婁)가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취하자 허루의 아내가 딸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고, 이찬 마제(摩帝)의 아내 또한 그 딸을 불러냈는데 태자가 마제의 딸을 보고 좋아하므로 허루는 마음이 상했다. 이때 왕은 미안한 생각이 들어 허루에게 “공이 이렇게 성찬과 좋은 술을 내어 즐거운 잔치를 베푸니 공에게 주다(酒多)라는 벼슬을 주어 이찬 벼슬보다 높게 한다”하고 위로를 한 뒤 마제의 딸을 태자의 배필로 삼았다. 주다는 후에 각간(角干)이라고 일컬었다.’
주연을 베풀어 준 허루의 딸보다 마제의 딸을 태자인 지마가 좋아하는 눈치였으므로 왕은 마제의 딸을 태자비로 삼은 대신 허루에게는 ‘주다(酒多)’라는 높은 벼슬을 주어 위로함 셈이다. 그러나 주다는 후에 각간(角干)이라고 일컬어졌다는 것으로 보아 벼슬을 여러 단계 높여준 것이며, 임금에게 맛있는 술을 대접하여 높은 벼슬을 얻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신라는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 술을 멋과 흥을 즐기는 문화가 널리 보급되었던 모양으로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유적이 경주에 남아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포석정(鮑石亭)으로 지금은 포어(鮑魚)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수구(水溝)의 흔적만 남아있지만 건립 당시에는 경주 남산의 서쪽 계류가 흐르는 운치 있는 자연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정자도 서 있었으며,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베풀고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계곡의 맑은 물을 유도하여 포어 모양으로 축조한 수구에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문무백관이 품계에 따라 수구 옆에 차례대로 앉아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수구에 흘러오는 술잔을 집어 마시고 흥겨워했다. 이와 같은 연회를 곡수주연(曲水酒宴)이라고 하며, 옛날 중국과 일본에도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오늘날까지 그 유적이 남아있는 곳은 경주의 포석정뿐이다.
이처럼 술의 문화가 발달했던 신라의 술은 특히 맛이 있었던 모양으로 먼 중국의 당(唐)나라에까지 알려졌고, 8세기의 유명한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은 ‘한 잔 신라 술의 기운이 새벽바람에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쉽구나’라고 노래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아득히 먼 옛날부터 가을이면 먹을 양식을 거두게 해준 하늘에 감사하는 제천의식을 올린 뒤 마시고 즐기는 풍류를 위하여 술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다. 특히 삼국시대부터는 평민들도 술을 빚어 마시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 문헌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술을 빚은 방법과 술의 종류에 대한 기록과 문헌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