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안에서 보기 드물게 솔밭을 정원으로 둔 건물이 있다 . 겉모습은 초록빛을 띠고 있어 주위 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 안쪽에는 기둥만 있는 열린 공간이라 한눈에 보기에도 시원하다 . 정관헌 ( 靜觀軒 ). 고요하게 내다보는 곳이다 . 고종황제가 외빈을 초대해 연회를 열거나 , 다과와 함께 음악을 들으며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
그런 공간답게 건물 안에서 바깥을 보면 전면과 양 옆의 초록빛 나무들이 눈에 들어와 마음이 상쾌해진다 . 건물 바깥쪽의 회랑에는 여러 가지 전통 문양이 그려져 있다 . 회랑을 따라 천천히 거닐다 보면 어느새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
전통문화와 서구문화가 어우러지다
정관헌은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 정면 7 칸 측면 5 칸의 직사각형 모양으로서 , 기둥과 지붕만 있어 건물 외관과 내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 회색 석재기둥이 지붕의 몸체를 받치고 있고 , 초록색 목재기둥이 처마부분을 받치고 있다 . 황금빛 철재 난간이 띠를 두르고 있어 품격을 더한다 .
공간은 주된 용도로 쓰던 석재기둥 안쪽과 보조 용도로 쓰던 목재기둥 안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 그러니까 석재기둥 안쪽은 본래의 용도인 연회가 열리던 곳이고 , 목재기둥 쪽은 일종의 베란다로서 잠시 연회장을 벗어나 휴식이나 머리를 환기시키던 곳인 셈이다 .
1900 년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 (Sabatine) 이 설계하여 그동안 보았던 우리나라 전통 건축양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건물 모양이다 . 지붕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기와가 보이지 않는다 . 기와가 보여주는 다양한 무늬와 적당한 선의 변화가 없이 그냥 밋밋하다 . 안쪽 석재기둥은 육중한 로마네스크양식을 따르고 , 바깥쪽 목재기둥은 화려한 코린트양식을 따랐다 .
겉모양뿐 아니라 건축자재에서도 차이가 있다 . 건물 안쪽에 부엌으로 쓰이던 곳으로 보이는 작은 공간이 있는데 , 이곳은 벽돌로 만들어졌다 . 목재로 담백하게 만들어진 것에 익숙해 있던 난간은 철재로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 벽돌과 철재는 우리나라 전통 건물양식에 잘 쓰이지 않던 자재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느 건물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 건물 외관을 좌우하는 지붕은 기와만 얹지 않았을 뿐 전통양식인 팔작지붕 형태다 . 지붕과 기둥의 색채 또한 초록색을 사용하여 주위의 솔밭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 건물 바깥쪽의 장식 또한 눈에 익은 모습이다 . 철제 난간에는 왕실의 장수를 기원하며 사슴과 소나무를 새겨 넣었고 , 목재기둥 윗부분에는 왕실의 번영을 뜻하는 박쥐와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오얏꽃을 그려 넣었다 . 비록 외관은 서양식으로 만들었지만 , 그 안에는 우리의 문화와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
마냥 희희낙락 할 수만은 없는 곳
본래 이곳은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곳이다 . 그런 곳이니 만큼 건물도 지금처럼 기둥만 있는 것이 아니고 벽돌로 쌓은 벽이 있었다 . 1930 년 이전에 찍은 오카다 미츠구의 사진에서도 건물 안쪽이 모두 벽돌로 쌓아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일제 강점기에 이 벽이 허물려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고 일반인에 개방되었다 .
왜 허물었을까 ?
조선왕조의 혼이 담긴 곳을 훼손하여 독립의 의지마저도 없애려는 일제의 말살정책 때문이다 .
초록빛 목재기둥 위쪽에 유독 눈에 띄는 흰 무늬가 있다 . 오얏꽃 모양의 이화장 ( 李花章 ) 이다 . 정관헌 뿐 아니라 덕수궁 건물 곳곳에서 이화장을 찾아 볼 수 있는데 , 많아도 너무 많다 .
왜 그럴까 ?
오얏꽃은 조선왕실의 상징이다 . 일제가 대한제국을 자주 국가가 아니라 일본 천황의 지배를 받는 하나의 가문으로 격을 낮추기 위해 궁궐 곳곳에 이화장을 새겨 넣었기 때문이다 .
커피 맛은 과연 어땠을까 ?
정관헌에 대해 흔히 알려진 이야기가 ‘ 고종이 커피를 마시던 곳 ’ 이란 내용이다 . 안내판에도 “ 고종황제께서 차를 즐기시고 음악을 들으시던 곳 ” 이라 했으니 , 그 내용이 틀린 것만은 아닐 것이다 . 듣기에 무척 낭만적이고 여유로워 보인다 .
고종 (1852~1919, 재위 1863~1907) 은 조선왕조 역대 왕 중에서 가장 비운의 왕이다 . 승냥이처럼 달려드는 열강들 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한다 . 그것도 모자라 결국 1910 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당하는 꼴까지 보게 된다 . 이런 상황에서 마시던 커피가 과연 달콤하기만 했을까 ?
Tip.
이곳까지 왔다가 정관헌만 보고 흔히 지나치게 되는 숨은 보물이 있다 . 바로 정관헌에서 덕홍전으로 이어지는 꽃담이다 .
예쁜 무늬가 새겨진 담을 ‘ 꽃담 ’ 이라 하는데 , 이곳의 꽃담 지붕에는 봉황과 용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꽃담 중간쯤에 오직 어진 사람들만 출입하는 문이란 유현문 ( 惟賢門 ) 이 있다 . 둥근 아치형태로 벽돌을 쌓아 만든 문인데 아름답기 그지없다 . 문 위 좌우측에는 용이 새겨져 있고 , 문을 통과해 반대쪽에는 학이 새겨져 있다 .
이 꽃담과 유현문은 외빈을 맞는 장소인 정관헌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도록 만들어져 결코 놓칠 수 없는 곳이다 .
글 / 사진 엄태성 ( 연대 여행작가 . http://cafe.naver.com/yst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