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News old news 소년, 붓으로 자연으로 노래하는 화가로 돌아오다.

소년, 붓으로 자연으로 노래하는 화가로 돌아오다.


소년이 유년시절 살던 곳은 속칭 ‘산지’, 서부두방파제와 산지포구, 월파를 막기 위해 높이 쌓은 제방, 이곳은 예전에 민속 5일장이 열렸던 곳이다.
소금공장, 엿공장, 고물상, 창고, 공업사, 덕지덕지 판잣집이 어우러진 전형적인 빈촌으로 항구에 선원들이 많이 왕래하면서 생겨난 집장촌이 유년시절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는 소년에게는 치명적인 환경조건이었지만, 그래도 소년은 서예와 그림에 상당한 소질을 가졌던 아버지(김대현)의 재능을 이어 받았는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 정서를 순화하면서 살아왔다.
청소년들이 유일한 여가장소로는 탁구장, 이곳에서 청소년들의 비행이 시작되었고, 무리를 지어 폭력을 행사하며 조직 폭력배로 변했지만 그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낮 동안은 그래도 여니 마을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고 고함을 지르고 싸움을 하는 것은 다반사고, 집장촌을 지나 올 때면 나이와 상관없이 여성들이 유혹하는 손길 등 도무지 청소년들이 정상적인 성장을 기대하기 조차 어려운 환경이었다.
고물상에는 엿을 파는 이들이 집단 기거하며 그들의 난폭한 행동이나 내뱉어서는 안 될 저속한 말투며 귀를 열면 들리고 눈을 뜨면 보이는 것들이 소년을 일탈과 방황으로 유도하기에 충분했지만, 소년은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고 연필과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며 내면을 곱고 곱게 다듬어 나갔다.

물론 이곳에서 자란 이들이 전부 환경의 영향을 받아 일탈, 방황, 비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 스스로를 강인하게 다듬고자 태권도를 하는 친구, 학업에 열중하여 박사, 교수, 의사, 사업가가 된 이들도 많다.
김 작가는 자신이 자라온 과거를 보면서 청소년들이 자라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조건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김재호 작가는 “청소년들이 자연과 더불어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고 하는 것을 우리 어른들이 일깨워 줘야 한다.”고 했다.
유년시절부터 소년은 그림에 재능이 있었고, 재학시절에는 항상 미술 특기생으로 내면에 쌓여 있는 저력이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군대생활을 마치고 몸이 많이 아팠다. 마음의 병과 육신의 불편함이 엄습해오면서 무엇인가의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는데 그것은 자아의 세계를 찾고 마음의 평온을 갖는 길이다. 한동안 그림 그리기를 중단했던 소년의 손에 붓을 들었다. 바로 그림이 그의 세계이고 마음의 고향인 것이다.
김 작가는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한 사람이다. 아니 오래 전부터 그림에 소질은 있었으나 자연의 마음을 열고 자연의 소리를 듣게 된 것이라 설명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 루소는 하위직 관리로 있다가 49세가 되던 해에야 비로소 그림을 시작했고, 유명한 고갱도 40세가 넘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또한 고흐가 본격적으로 그림에 혼을 바친 것은 30세가 되고 나서였다. 그래서일까 김 작가의 그림들은 인상파 회화들처럼 빛을 색채로 포착하는 것을 매개로 하여 자유로운 비전을 실현할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자연에 함몰되어 행복감이 넘쳐흐르고 있는 것이다.


김 작가의 화폭은 자연이 주제다. 그러나 자연이 자기의 속살을 드러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자연을 품으로 옮겨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연은 반드시 화가에게 저항한다. 그러나 저항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싸움에는 약이 된다. 아주 깊은 곳에서 성실한 화가와 자연은 악수한다. 확실히 자연은 거머잡기 힘들다. 그러나 그것을 꼭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 단단한 손으로“ 빈센트 반 고흐의 말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김 작가는 자연을 모사(模寫)하기보다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연을 그리되 자연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구성하고 현실의 색보다 강조된 색채를 선명하게 대비시킴으로써 시각적인 긴장감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최대한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 작가의 화풍은 다른 작가들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세잔은 “자연을 모사해서는 안 된다. 자연을 설명할 일이다.”고 말 했듯이 작가는 자연을 모사하기 보다는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김재호 작가는 자주를 사랑하고 제주의 자연과 함께 살면서 제주 자연의 풍광 그리는 사람이다. 화북, 삼양, 하귀, 산방산, 일출봉, 서귀포, 중산간, 해안도로 등등, 제주 섬 곳곳이 그의 발이 닺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로 돌담길, 유채꽃, 벚꽃, 슬레이트 집, 억새, 산, 바다, 포구, 눈 쌓인 숲 등 소재가 다양하다.
인물과 정물도 그리지만, 그의 주제는 아무래도 자연 풍경이다. 그는 같은 풍경이라도 그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명쾌하게 담아낸다.


김 작가는 왜 자연에 심오한 창조적 욕구를 발휘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간결하다. ‘자연은 수시로 변한다. 그 변화는 견줄 데가 없다. 사시사철 계절의 흐름 따라 시시각각 그 형태가 달라지고 모습을 바꾸는 것이 바로 자연인게다. 빛과 대기의 흐름에 따라 수없이 얼굴을 달리하는 자연이냐 말로 화가들에게 영원한 표현의 대상이오. 창조적 욕구의 밑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다.
김 작가에게는 자연은 광대한 테두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색채가 언어화 된 빛을 통해서, 즉 눈을 매개로 하여 느낄 수 있는 자연인 것이다. 일찍이 브라크는 “실물에 전혀 감복하지 않는데 그림이 되면 비슷하다고 하여 감복하게 되니 그림이란 그렇게 공허한 것인가”라고 탄식했다고 하지만, 김 작가는 결코 공허하지 않은 인생을 걸만한 작업임을 이제 막 증명하기 시작했다.
그림은 무엇을 가르쳐 주지는 않으며, 그림에서 무엇을 배우는 사람도 없다. 다만 보는 사람 앞에 존재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그래서 김 작가는 ‘보는 사람 앞에 존재하는 그림’의 명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은 갤러리를 준비 중이다.


그의 쉼 없는 열정은 생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등동을 떠나 새롭게 정착한 곳은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산굼부리와 사려니 숲 관광을 하면서 지나치는 길목에 ‘숲길 따라 풍경 따라 그림이 있는 집’ 하늘래기 교래국수촌을 열었고 이곳에서 기거하며 작업실도 마련되었다.
김 작가의 작업실이며 갤러리를 준비 중인 곳이 교래리에 위치한 하늘래기 교래국수촌이다. 하늘래기는 하늘타리, 하늘수박의 제주도 방언이다. 그래서 국수집이 하늘래기로 우거진 전통 찻집 풍입니다.


원목으로 지어진 전원주택으로 내부분위기가 정겹고 아늑하다. 들어서는 순간 여니 식당과는 너무 달라 놀라기 일쑤다. 방마다 김 작가의 화폭이 걸려있고, 통로와 바닥은 통나무로 인테리어를 해서 자연 속으로 빠지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손님들은 주문한 식사는 제쳐놓고 김 작가의 그림에 빠진다.


자연을 사랑하는 김 작가를 닮아 부인 이임순씨의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고 멸치육수를 사용하여 깔끔하면서 시원한 국물 맛을 느껴볼 수 있는 국수요리가 있다. 가게 내부 걸려있는 액자 속 그림들은 모두 김 작가의 작품이다. 맛있는 국수 드시면서 그림들을 감상하라는 친절한 안내를 한다.


제주 관광길에 의미있는 여행으로 추억에 남기고 싶어 교래국수촌을 방문하면 김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고 작가와의 대화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 그림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화실을 직접 안내하여 공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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