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영 시인 , 사랑을 읽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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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읽는 시

어느 가난한 섹스에 대한 기억

온 동네가 가난을 식구처럼 껴안고 살던 시절
언니와 나는 일수 ( 日收 ) 심부름을 다녔다 .

우리 집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일수 ,
월곡동을 지나 장위동을 거쳐 숭인동까지
카시오페아좌 처럼 뚝뚝 떨어져 있는 다섯 집을 다 돌면
일수 수첩 사이에서 돈의 두께가 부풀어 오르고
내 가슴에 도장밥 빛깔의 별들이 철없이 떠올랐다 .

일수 수첩 속에는 각각 다른 여러 겹의 삶들이
붉은 도장의 얼굴을 하고 칙칙하게 접혀져 있었다 .

어느 날 추위를 툭툭 차며 집에 도착했을 때
벌써 갔다 왔니 ? 하던 엄마의 이마에 송송
맺혀있던 땀방울과 아버지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파도처럼 널브러진 이불 , 들킨 건 나였다 .

아무것도 못 본 척 문을 닫고 나오던 내 뒤통수를
쌔리며 사춘기는 내게로 다급하게 휘어들었다 .

삼십 대 후반의 젊은 부모에게
꼭 묶어두어도 터져 나오던 ,
때론 밥 생각보다 더 절박했을 ,
한 끼의 섹스가 가난한 이불 위에
일수 도장으로 찍혀있던 , 겨울 그 단칸방 .

언니와 나는 일수 심부름을 다녔다 .

– 시집 , 왼손의 쓸모 ( 천년의 시작 , 2006) 중에서


섹스란 사랑의 약속이자 사랑하는 사람끼리 몸으로 나누는 가장 애틋하고 아름다운 대화이다 . 서로의 몸을 비비고 매만지며 체온을 공유할 때 가슴속은 온통 벅찬 감동으로 가득 찬다 .

비록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의 체온을 통해 애정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다 . 한동안 쌓여 있던 크고 작은 오해의 감정들도 상대방의 품속에 안기면서 봄눈 녹듯 녹아내리고 , 영원히 안녕이라며 단단히 걸어뒀던 마음의 빗장도 서서히 열린다 .

그렇게 마음을 다해 나누는 몸의 대화는 서로를 둘도 없는 연인으로 그리고 부부로 만들어준다 .

호기심에 찬 어린 눈알들이 또록또록 굴러다녔을 단칸방에서 언제 생겼는지 , 한 집에 예닐곱 씩 터져 나오는 형제들을 본다 .
우리네 부모들은 그렇게 아이들을 낳았고 길렀다 . 그 없던 시절에도 성은 건강했다 . 그리고 틈틈이 밥을 먹듯 맛있는 섹스를 성스럽게 치르며 일수 도장을 찍었다 .
천천히 먼 길을 돌아서 일수 심부름을 다녔을 언니와 어린 시인도 모두 우리의 자화상이다 .

제정러시아 시대 혹독한 추위에 온통 얼음뿐인 시베리아로 유배된 남녀가 눈 속에 굴을 파고 살다 결국 얼어 죽었다 .

그 절체절명의 시간이었을 그곳에서 섹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
확실히 섹스는 모든 생명의 기본 단위인 밥과 같다 . 밥보다 더 맛 좋은 섹스는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 . 사랑은 섹스가 함께 할 때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 . 사람답게 사는 지혜란 사랑과 섹스가 있어야 살 만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