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운명으로 초원에서 잠들다…중국 4대미인 왕소군

중국인들은 자신의 역사와 역사 속 인물을 두고 몇 명씩 꼽아서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 그 중에서 세간에 많이 알려진 것 중 하나로 ‘ 중국의 4 대 미녀 ’ 가 있다 . 사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본다면 과연 미인으로 꼽힐지는 의문이지만 그들이 역사 속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이렇게 중국 역사에서 꼽는 4 대 미녀는 서시 , 왕소군 , 초선 , 양귀비라고들 말한다 .
초선과 양귀비는 역사상 워낙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만큼 다음 기회에 따로 다뤄 보기로 하고 , 서시는 조금 낯설 수 있으니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서시 ( 西施 ) 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름난 미인으로 월나라의 구천이 이 서시를 숙적인 오나라와 부차에게 보내 부차가 서시에 빠져 정사에 소홀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 서시의 미모와 관련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 하루는 서시가 두통이 심해서 미간을 찌푸렸는데 , 그 모습도 또한 아름다워 그 나라의 모든 여인이 서시를 따라 미간을 찌푸리고 다녔다고 하니 그녀의 미모가 당시에 얼마나 출중했는지 짐작해 볼수 있다 . 이 서시는 장자 ( 莊子 ) 에서도 미인의 대명사격으로 종종 등장한다 .
여하간 서시를 비롯해 초선과 양귀비들은 공통적으로 황제나 왕의 총애를 받아 고귀한 지위에 오를 수 있었고 , 그런 총애가 지나쳐 결국 나라가 기우는 결과로 이어져 후대 역사가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 대부분이다 . 하지만 이들과 달리 역사가들의 연민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미인이 있으니 바로 왕소군이다 . 오늘날 중국에서는 한족과 소수민족의 화합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는 왕소군은 누구일까 ?

중국의 4대미인 '왕소군'

왕소군은 성은 왕이고 원래 이름은 장 ( 牆 ) 이라고 하고 소군은 자 ( 字 ) 이다 .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 때의 여인인데 , 고향은 오늘날 중국 호북성 흥산현이라고 한다 .
왕소군은 본래 원제의 후궁 , 궁녀였다 . 하지만 그녀는 당시 한나라와 우호관계에 있던 유목민족인 남흉노의 선우 ( 흉노족의 수장을 선우라고 부른다 ) 에게 졸지에 시집을 가는 신세가 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다 . 아니 황실의 후궁으로 있던 여인이 어째서 이민족 수장의 부인으로 하루아침에 운명이 뒤바뀐 것일까 ?
그와 관련해서 ‘ 서경잡기 ( 西京雜記 )’ 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중국의 황제는 그 광활한 대륙을 통치하는 만큼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후궁을 궁안에 두고 있었다 . 한 예로 서진의 무제 사마염의 경우에는 후궁을 무려 1 만명이나 두고 있었다고 한다 .
전한의 원제도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많은 후궁을 두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 그러다보니 자신이 일일이 후궁의 얼굴을 보고 확인할 수가 없어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낸다 .
즉 , 화가를 시켜서 후궁들의 초상화를 그린 다음에 그 그림을 보고 그날 그날 머무를 후궁의 처소를 정하기로 한 것이었다 . 일종의 사진목록앨범을 만든 셈인데 , 당시에 카메라는 없었을 때이니 초상화로 대신한 셈이었다 .
그러자 원제의 후궁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화공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잘 그려줄 것을 부탁하면서 막대한 뇌물을 바쳤다 . 화공은 궁녀들이 뇌물을 준만큼 실물보다 더 아름답게 그림을 그렸다 . . 오늘날로 치면 포샵질로 원본을 손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그런데 그 와중에 오직 한사람 왕소군만은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고 한다 . 자신의 미모에 자신이 있어서인지 , 아니면 뇌물을 바칠만한 여력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왕소군을 괘씸하게 여긴 화공은 왕소군의 초상을 실물보다 못하게 그려서 황제에게 바쳤다 .

과연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을 보고 왕소군이 심각한 추녀라고 생각해 왕소군에게는 한 번도 가지 못했습니다 . 그렇게 왕소군은 후궁이지만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황궁에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
그러던 어느 날 한나라 북쪽에 유목민족인 남흉노의 호한야선우가 한나라의 수도에 방문 ,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다 .
당시 남흉노는 한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신하를 칭하고 있었는데 , 그런 신하로서의 자격으로 장안에 방문한 것이었다 . 그런데 황제를 만난 호한야선우는 원제에게 한나라 황실과 혼인관계를 맺고 싶다는 제안을 하게 되었고 , 이에 원제는 남흉노와의 우애관계를 돈독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선선이 허락했다 .

원제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후궁 중에서 적당한 여인을 골라 선우의 혼인상대로 삼을 생각이었다 . 이것은 화번공주라고 부르는데 , 농경문명의 한족왕조와 유목민족 사이에 긴장을 완화시키고 평화를 유지하려는 정략적 목적으로 보내는 희생양이 바로 이 화번공주였다 . 아무래도 그런 성격을 갖고 이뤄지는 혼인이다보니 원제는 후궁 중에서 황제의 마음이 없었던 여인 중에서 고르게 되었고 ,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왕소군이 당첨 (?) 되고 말았다 .
그렇게 하루아침에 수도의 황궁에서 머나먼 북쪽의 초원으로 가 이민족 수장의 아내가 된 왕소군 …
그녀에겐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 그저 주어진 기구한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었다 .
이윽고 호한야의 선우에게로 떠나기 전 원제 앞에 불려나온 왕소군을 보고 원제는 아차 싶었다 . 왕소군의 미모가 그림과는 딴판으로 절세미인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서경잡기는 전하고 있다 .
“ 이런 미인을 몰라보고 선우의 신부감으로 보내다니 !” 원제는 후회하며 없던 일로 무르고 싶었지만 이미 호한야선우와 왕소군을 보내기로 한 상황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 자칫 양국간의 불화로 번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 그렇게 원제는 눈물을 머금고 왕소군을 초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

대신 원제는 이런 절세미인을 뇌물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하게 그린 화공을 용서할 수 없었다 . 그래서 원제는 화공들을 모두 시장으로 끌고나와 ( 중국에서 사형수의 처형은 항상 시장에서 이뤄졌다 ) 목을 베었다고 전해진다 .
한나라의 후궁에서 졸지에 흉노 선우의 아내가 된 왕소군 . 그런데 남편인 호한야 선우는 결혼한지 2 년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
호한야 선우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조도막고란 자가 선우가 되었는데 , 왕소군은 흉노의 풍습에 따라 아들뻘인 조도막고와 다시 결혼을 했다 . 조도막고는 왕소군과 결혼하고 10 여 년을 살다가 또 사망했는데 , 이 이후로 왕소군의 행적은 더이상 알길이 없다 .
다만 왕소군이 묻힌 곳은 청총이라 불리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데 이와 얽힌 전설도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
왕소군의 묘를 청총이라 불리는 이유는 겨울에 초원의 풀들이 모두 죽어 갈색이 되어도 왕소군의 무덤은 항상 파란 풀들이 자라 있었기에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
이 청총에 얽힌 전설은 몇 가지가 있다 .
하나는 왕소군이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아 하늘로 올라가는데 흉노인들이 왕소군의 발 아래에 토대를 쌓아서 왕소군이 가지 못하게 하려 했다고 한다 . 하지만 갑자기 붉은 빛이 번쩍하더니 왕소군은 사라져 버렸고 사람들이 쌓아올린 토대만 남았는데 이것이 청총이 되었다는 것이다 .
또 다른 하나는 왕소군이 사망하고 흉노인들이 흙을 안고 와서 봉문을 만들었는데 그 후에 사람들이 계속 흙을 가져와 청총 위에 놓은 것이 관례가 되어 더욱 더 높아지게 되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더라도 황궁에 계속 남아 있었던 것이 나았을지 , 아니면 오랑캐 수장의 아내가 되어 두 번 다시 고향땅을 밟지 못하더라도 오랑캐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산 인생이 더 나았을지 오늘날 우리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는 점이다 .
그녀가 선우의 총애를 받은 덕분이었을까 ? 왕소군이 머나먼 북방의 초원으로 떠난 뒤 그녀가 살아있던 내내 한나라와 흉노 간에는 분쟁 한번 없이 평화로운 시기를 보낼 수 있다고 전해진다 . 오늘날에는 그런 왕소군의 공을 기려 그녀와 관계된 유적에는 마치 황제의 능처럼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 그곳에 왕소군은 말없이 지금도 남쪽의 고향을 바라보며 잠들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