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문수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등 9건 보물 지정

‘ 고창 문수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 등 9 건 보물 지정
(미디어원=강정호 기자)
문화재청 ( 청장 나선화 ) 은 ‘ 고창 문수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 등 9 건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하였다 .

보물 제 1918 호 ‘ 고창 문수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 高敞 文殊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 은 인간 세계를 교화하는 석가여래를 중앙에 두고 좌우에 동 · 서방의 정토 ( 淨土 ) 를 다스리는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를 배치한 삼불형식을 보여준다 . 삼불형식은 임진왜란 · 정유재란 이후 황폐해진 불교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신앙적으로 크게 유행하였다 . 이 삼불상은 1654 년에 벽암각성 ( 碧巖覺性 , 1575~1660) 의 문도들이 주축이 되어 수조각승 해심을 비롯한 15 인의 조각승이 참여하여 만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 이 시기 불교조각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다 . 통통한 양감이 강조된 인간적인 얼굴에 단순하고 기백 넘치는 주름 표현을 통해 조선 후기 불교조각이 추구한 평담 ( 平淡 ) 하고 대중적인 미의식을 잘 담아내고 있다 .

보물 제 1919 호 ‘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奉化 淸凉寺 乾漆藥師如來坐像 및 腹藏遺物 )’ 은 흙으로 형태를 만든 뒤 그 위에 삼베를 입히고 칠을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해서 일정한 두께를 얻은 후 조각하여 만든 건칠불상이다 . 이 불상에서 보이는 엄숙한 상호 ( 相好 ), 당당하고 균형 잡힌 형태 , 탄력과 절제된 선은 석굴암 본존불 등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의 양식 계통을 따르고 있는데 , 불상의 바탕층에 대한 방사선탄소연대 측정 결과도 이와 유사한 기원후 770~945 년경으로 도출되었다 . 따라서 이 불상은 이르면 8 세기 후반 , 늦어도 10 세기 전반에는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 이는 ‘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930 년경 , 보물 제 999 호 )’ 과 함께 우리나라 건칠불상의 시원적 작품으로서 중요한 조각사적 의의를 지닌다 .
보물 제 1920 호 ‘ 고창 문수사 목조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 일괄 ( 高敞 文殊寺 木造地藏菩薩坐像 및 十王像 一括 )’ 은 삭발한 승형의 지장보살상과 제왕형의 시왕 ( 十大王 ) 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제 8 평등대왕상에서 발견된 ‘ 조성발원문 ’ 덕분에 1654 년 3 월 당시 불교계를 대표했던 벽암각성 ( 碧巖覺性 ,1575~1660) 의 문도들이 주도한 불사 ( 佛事 ) 임을 알 수 있으며 , 조각승은 대웅전 석가여래삼불좌상을 만들었던 해심 등 15 인의 조각승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 본존인 지장보살상은 통통한 얼굴과 아담한 형태미가 두드러지며 , 시왕상은 지옥중생을 심판하는 사실적인 연출과 함께 고색 찬연한 채색이 돋보이는 17 세기 중엽 경의 대표적인 명부조각이다 .
보물 제 1921 호 ‘ 양산 금조총 출토 유물 일괄 ( 梁山 金鳥塚 出土 遺物 一括 )’ 은 경주가 아닌 양산 북정리 ( 北亭里 ) 에서 발견된 신라 고분군으로 신라 고분 문화의 전파와 계보를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 제작 시기는 경주에서 발견된 귀걸이와 금제 팔찌 등과의 양식적 비교를 통해 삼국 시대 6 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특히 , 누금세공으로 귀갑문 ( 龜甲文 ) 을 아로새긴 금제태환이식 ( 金製太環耳飾 ) 귀걸이는 신라 최고의 금속공예품으로 평가되고 , 금제조족 ( 金製鳥足 ) 은 국내에서는 유일한 것이어서 가치가 있다 . 이외에도 톱니모양의 금제팔찌 , 은제 허리띠 , 청동제 초두 ( 靑銅製鐎斗 ) 등도 경주 이외의 지역에서 발견된 사례로 , 중요한 의의를 지닌 유물이다 .
보물 제 1922 호 ‘ 부산 복천동 출토 금동관 ( 釜山 福泉洞 出土 金銅冠 )’ 은 현재 신라권에서 출토된 관 가운데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형태이다 . 주실인 11 호분의 피장자 우측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5~6 세기 신라 경주를 중심으로 한 출자형 ( 出字形 ) 금관과는 달리 대륜 ( 臺輪 ) 에 나뭇가지 모양의 입식 ( 立飾 ) 이 연결되어 있다 . 이는 부산 동래 지역의 고유한 형태를 반영한 것으로 특히 , 입식이 모여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점은 경주 교동 출토 금관과 유사하다 . 그밖에 입식 끝이 하향하고 있는 점 , 영락 ( 瓔珞 , 구슬 장신구 ) 이 없는 대륜에 물결무늬를 그려 넣은 부분 , 혁대를 조여 관을 쓰는 장치가 있는 점 등은 5~6 세기 신라관의 계보와 가야의 관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로 가치가 크다 .

보물 제 1923 호 ‘ 정조 어찰첩 ( 正祖 御札牒 )’ 은 정조가 1796~1800 년까지 4 년간 좌의정 등 고위직을 역임한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로 300 통에 달하는 다양한 내용의 어찰이 날짜순으로 6 첩 장첩되어 있다 . 이 어찰의 내용은 대부분 정사 ( 政事 ) 와 관련된 것들이어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서간문의 격식과는 다른 부분들이 있는데 , 발신자인 정조의 편지에는 발인일자가 없으나 수신자인 심환지는 수신한 일자와 시간을 기록하고 있어 후대에 남길 목적임을 알 수 있으며 , 어찰에 사용한 지질이 다양하여 긴급한 사안에 대해서는 지질이나 격식을 따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또한 , 한글과 이두식 표현 , 속담과 구어 등 실용적 문체를 구사한 점도 주목할 부분으로 조선 시대 서간문의 형식을 연구하는 데도 도움 되는 자료이다 .

보물 제 1924 호 ‘ 조선경국전 ( 朝鮮經國典 )’ 은 정도전 ( 鄭道傳 , 1342~1398) 이 조선 초기인 1394 년 국가경영을 위한 통치전범을 마련하기 위하여 , 조선의 건국이념과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전반에 대한 기본방향을 제시한 서적이다 . 개인적인 편찬물이기는 하지만 , 그가 조선건국의 중심에 있었고 , 실질적으로 조선건국의 이념을 창안한 실질적 책임자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 특히 이 책이 토대가 되어 이후 ‘ 경제육전 ( 經濟六典 )’, ‘ 육전등록 ( 六典謄錄 )’ 등 법전의 편찬단계를 거쳐서 조선의 기본법전인 ‘ 경국대전 ( 經國大典 )’ 의 편찬에 모체가 되었다는 점과 , 조선전기의 간본으로는 이 책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조선의 출판과 법전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
보물 제 1147-3 호 ‘ 묘법연화경 권 5~7( 妙法蓮華經 卷五 ~ 七 )’ 은 1470 년 ( 성종 1) 에 세조비 ( 世祖妃 ) 인 정희왕후 ( 貞熹王后 ) 가 차남인 예종 ( 睿宗 ) 이 돌아가자 이미 고인이 된 세조 ( 世祖 ) 와 장자인 의경왕 ( 懿敬王 ; 德宗 ) 그리고 예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왕실판본이다 . 조선전기 왕실판본의 사례로서 간행시기와 동기가 분명하며 , 보존상태 또한 양호하고 , 전래되는 같은 초기 인본 ( 印本 ) 이 극히 희소하기에 귀중하다 .
보물 제 1196-2 호 ‘ 묘법연화경 권 4~7( 妙法蓮華經 卷四 ~ 七 )’ 은 태종의 넷째 아들인 성녕대군 ( 誠寧大君 ) 이 14 세에 요절하자 그의 장인으로 인순부윤 ( 仁順府尹 ) 직에 있던 성억 ( 成抑 ) 이 성녕대군과 대군의 모친인 원경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경전이다 . 당대의 명필로 불린 성달생과 성개 형제가 서사한 법화경을 저본으로 하여 판각한 책판에서 인출한 것으로 전 7 권 가운데 권 4~7 이다 . 이 책은 보물 제 1196 호인 ‘ 묘법연화경 ’( 통도사 소장 ) 과 동일한 간행본으로서 같은 판본에서 찍어낸 것이다 . 이번에 지정 예고되는 대상은 판면의 상태가 선명하고 다른 발문이 없다는 점에서 1422 년 판각 즉시 인출한 초인본 ( 初印本 ) 으로 추정된다 . 조선 초기의 불교사 연구와 인쇄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한 문화재가 체계적으로 보존 · 활용될 수 있도록 해당 지방자치단체 , 소유자 ( 관리자 ) 등과 적극 협조해 나갈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