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광산업의 어제
관광산업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지만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관광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차별되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태초부터 있었으리라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
천오백년전, 삼국시대의 화랑이 심신을 단련하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높은 산과 깊은 계곡 맑은 물을 찾는 것이나 스님들이 명산대찰을 찾아 구도의 길을 걷는 것에서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나는 관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대한민국에서 관광산업이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1960 년대 중반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일제 식민시대와 6 25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의 경제를 살리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 중 관광산업과 관련한 정책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
먹고 살기가 몹시도 힘들었던 시기에 국내관광은 상상도 하지 못할 때이고 관광인프라 역시 전무하였으니 관광정책은 달러벌이를 위한 외국인관광에 초점을 맞추었다 .
60 년말 본격적인 외국인관광의 시작
‘ 국내관광 해외관광 외국인관광 ’ 순으로 발전해 나가는 일반적인 관광산업의 흐름과는 달리 우리 관광산업은 외국인관광을 최우선으로 한 정책을 출발점으로 했다 .
60 년 중반에 시작된 관광정책의 골자는 외래 관광객의 유치였으며 전후 급속한 경제부흥을 이룩한 일본은 자연스레 주요 대상국이 되었다 . 그렇다고 당시 정부의 관광정책이 일본에 편중된 것은 아니었다 . 미국 캐나다와 호주 유럽 등 선진 각국을 대상으로 한 관광홍보 역시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
실제 1980 년대 초반까지 한국을 찾는 관광객은 미국과 유럽 40% 일본 60% 로 조화롭고 균형잡힌 모양새를 유지했는데 대한여행사 세방여행사 한진여행사 등 여행업계를 대표하는 여행사에는 구미 인바운드팀과 일본 인바운드팀이 운영되었으나 규모 면에서는 구미팀이 오히려 더 큰 경우가 많았다 .
당시 여행사 구미팀의 주요 행사는 정부 초청의 UN 참전용사 그룹행사와 주한미군의 여행관광 행사가 주를 이루었으며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정부나 기관의 관광관련 업무 등 규모가 상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지불조건도 좋고 상당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
참전용사단체들이 많았던 당시 , 남북대치의 현장인 판문점은 여행일정의 주요 방문지 중의 하나였으며 라스베가스에서 도입했다는 워커힐 쇼 역시 반드시 봐야 하는 필수코스였다 .
70 년초부터 본격화된 일본관광객의 한국방문
60년대 말부터 지속해 온, 일본관광객 유치를 위한 여행업계의 노력은 정부의 지원으로 이른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매년 막대한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국민들의 생활은 윤택하고 여유로왔다 .
70 년 초부터 일본에는 본격적인 해외여행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지근거리의 한국은 주요 목적지 중의 하나로 특히 남성들 사이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
일본관광객들의 관심사는 미주 유럽의 관광객과는 판이했다 . 판문점이나 남산 등의 관광코스보다는 Night Life 와 카지노에 초점이 맞춰졌다 . 워커힐 카지노는 일본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이들을 위한 유흥접객업소인 관광요정은 연일 이어지는 관광객들로 빈 방을 구하기 힘들 정도였다 .
수년 전까지의 태국이나 필리핀처럼 우리 역시 가난하고 내세울 관광자원이 변변치 않았으니 ‘ 기생관광 ’ 이라는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짓이 시작된 것이다 . 그로부터 1990 년대 중반까지의 25 년간 한국관광은 바로 ‘기생관광’의 시대였다 .
80 년대 중반부터 감소하기 시작한 구미인바운드가 90 년대 초반에 완전히 사라지면서 한국을 찾는 외래 관광객의 95% 이상이 일본관광객이었으며 그 중 75% 이상이 기생관광을 목적으로 했다 .
글: 강정호 기자 사진: 한국관광공사 제공
기획특집 한국관광산업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2 과당경쟁 , 비리와 부조리의 일본인바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