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에 다른 동남아 국가들의 입국날인이 대 여섯번씩 찍힐때 필리핀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널리고 널린게 저가 항공편이고, 알고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동남아 지역임에도 그랬다. 왜 그런가 반문해보니 단순히 ‘섬 나라라서’였다. 다른 국가,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지리적인 특성상 일찌감치 ‘내 여행스타일에는 맞지 않아’라고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 여행자에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선 긋기’만큼이나 독이 되는 것이 또 있을까. 하물며 여행하고 그 경험을 글로 옮기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편견은 치명적이다. 그리하여 이번 필리핀 여행의 부제는 자연스레 ‘편견퇴치’가 됐다.
‘내가 알고 있던 필리핀 날씨 맞아?’
푹푹 찌는 더위, 숨이 턱!하고 막히는 습한 공기, 인상 구겨지는 뙤약볕.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해온 필리핀의 날씨였다. 으레 ‘동남아의 섬 나라라면 이렇지 않을까?’하는 무책임하고 막연한 편견이 만든 결과였다. 우리 일행이 필리핀을 찾은 4월초. 일행들에게 ‘엄청 더울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것이 무색하게 덥지 않은 날씨다.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나라 6월초쯤. 이 정도면 땡큐다.
필리핀이 항상 덥기만 한 것은 아니다. 1년 내내 여름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덜 덥고 화창한 때가 있다는 말씀. 대부분의 동남아 지역처럼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1월부터 6월까지는 비가 적게 오고 맑은 날씨가 지속되는 ‘건기’와 나머지 기간의 ‘우기’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2월부터 5월까지는 적당히 덥고, 습도가 높지 않아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다. 날씨 운이 지독히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필리핀에는 바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섬 나라에 대한 오해 두 번째. ‘섬이면, 볼 만한 것이 바다뿐이지 않아요?’ 필리핀 바다가 사람을 홀리게 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바다빛’만으로 필리핀을 기억하는 것은 좀 아쉽다. 제주 앞바다의 낭만이 전부가 아니듯, 내륙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초록의 물결이 대지를 휘휘 감고 있는 넉넉하고 아름다운 대지가 필리핀에도 있기 때문이다. 바다빛의 황홀함과는 조금 차원이 다른 감탄이었다. 아주 천천히 곱씹고, 주변을 여러 번 둘러봐야 찾을 수 있는. 평범한 줄 알고 발을 디뎠는데 알고 보니 비범했던 풍경들의 연속이었다. 보홀섬의 초콜릿힐에서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을 절경을 마주했고, 팔라완섬의 지하동굴 탐험 중에는 땅 아래 풍경의 신비로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순간들이었다. 필리핀에 가시거든 초록의 품에 안겨보시라! 필리핀 관광청의 슬로건-‘More Fun in the Philippines(필리핀에서의 색다른 즐거움)’이 얘기해 주는 것 처럼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니.
‘그래도 역시 사람’
역시 이 세상의 모든 여행은 ‘사람’으로 귀결된다. 그에 합당한 비용을 지불했든, 측은과 선의일 뿐이든 ‘나의 여행은 여러 사람의 힘으로 굴러가는 것’이라 신념이 필리핀에서도 지속됐다. 동네 작은 장터에서 만난 야채가게 아주머니의 호탕한 웃음, 계곡에서 만난 소녀들의 꽃같은 미소도, 어눌하게 한 마디 툭 내뱉은 타갈로그어에 대견하다는 듯 눈빛을 보내온 여러 사람들.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 연예인을 좋아해 주는. ‘김수현’얘기를 할때면 얼굴이 붉어지던 현지 가이드의 표정까지. 필리핀만큼이나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그들’덕분에 필리핀 여행이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울 수 있었다. 이 다음 필리핀 여행을 더욱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살라맛 뽀(감사합니다.) 필리피노!
글 사진: 전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