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은 뒤안길로 가지만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근대사 까지도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마크 주커버그가 개발한 페이스 북을 위시한 오늘날의 통신과 기록수단의 발전은 역사를 승자만의 기록으로부터, 있었던 모든 사실을 고스란히 남길수 있는 글과 소리와 사진으로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도록 해주어 승자의 일방적인 기록남김으로는 불가능해 졌다.
지금 80대의 중반을 넘겨 살아있는 사람들은 일제치하의 쇼와(昭和)시대에 나라없는 나라에서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태어나, 우리의 힘이 아닌 타국의 힘에의한 해방을 맞고 찬탁과 반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자와 민주주의 이념을 가진자들의 싸움에서 하나의 국가로 외침을 당했던 나라가 두 개의 나라로 나뉘어져 각각 독립과 유일이라는 기치하에서 해방된 지 5년도 채 되기전에 민족간의 전쟁을 겪어야 했고, 그러고서도 하나가 되지 못한 채로 전쟁을 잠시 쉬는 휴전 상태에서 64년 을 이어왔다.
남과 북이 두 나라로 나뉠 때는 북쪽은 일제가 건설했던 공업지대로 풍부한 수력발전에 의한 에너지원이 있었지만 남쪽은 조금 큰 공장 하나를 가동하자면 그 공장이 석탄에 의한 자가발전을 해야만 했고 일반가정은 도리어 그 공장들의 자가용 전력을 얻어다 전등을 켜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기에 GNP는 북쪽이 남쪽에 비해 더 높은 수준이었다. 오죽한 수준이었으면 어느 영국의 기자가 ‘한국이 국가답게 되는것은 쓰레기 통에서 장미가 피는 격일 것’이라고 했겠는가?
그랬던 나라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위대한 국가 경영자 한 사람과 기업 경영자 몇 사람을 낳으면서는 자본주의의 생리를 따라 국가가 물살의 흐름을 타면서는 서구제국이 3백년, 4백년에 걸쳐 이룩한 자본주의 경제발전을 그 십분의 1의 기간에 완성한 것이 남쪽이고, 반면에 공산주의 배급주의 공동체 경제를 택한 북쪽은 경제발전이 뒤쳐지자 이를 군사력을 우위로 만들어 다시 전쟁을 지속하여 전쟁에 이김으로써 부강을 이룬 남쪽을 병탄하고 보자는 모험주의로 이끌고 말았다. 그러나,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 공동체 경제를 지향하던 이상론의 종주국들이 그 주의사상의 한계성 때문에 뒤늦게 자본주의 경제로 경제체재만은 이행하게 되자, 북쪽은 끈 떨어진 표주박 신세가 되었고 이들과 발맞추는 것은 정권의 붕괴를 전제로 하는 일이라 판단되자 도리어 더 강력한 폐쇄정책을 펴면서 누가 봐도 자살용인 핵무장에 눈을 돌리고 말았다. 이는 경제의 괴멸은 촉진하는 결과임이 자명한대도 말이다.
2016년과 2017년의 대한민국은, 청소년기에 남북한의 세력이 거의 대등하던 시절, 자본주의가 그 속성상 부익부 빈익빈을 낳고 국가 대신에 기업이 국민을 착취하게 되고 인권의 일부 무시 사태가 자행됨을 이유로 정부와 기업의 시책에 반대만 하면서, 이러한 사태는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과, 거시적 안목에서 세계의 흐름을 보기를 거부하는 계층을 양산하게 되어 이들은 이상만은 선이고 현실은 악이라는 소아병적 지식인으로 고질화 시키고 말았다.
이들은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을 막아 댐을 막아 그 댐에 물이 가득차기 까지 계곡아래 평야가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만을 이용하는 고통을 당하더라도 댐이 차고나면 하늘로부터 비가 내리지 않는 때도 물을 쓸 수있게 된다는 크고 길게 볼 안목은 죄악인 줄로만 알고 계곡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밴댕이 소갈머리로 고착되고 만 것이다.
이들 밴댕이 소갈머리들이 국가의 국회, 정부, 법원, 언론, 노동계, 교육계, 예술계등 모든 분야에 중견으로 기성인화(40대 후반~50대 중반)하자 그네들의 젊었던 날 이상주의를 되살려 자본주의 부정을 들고 일어선 것으로 본다. 이들의 단점은 고생을 하거나 굶어본 적이 없고 피압제 국민이 된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자본주의의 붕괴와 시장경제의 해체가 그들의 정의에 합치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지금 2017년의 대한민국을 이끈다고 하는 세력들이 그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는 길은 내부적으로는 불행히도 없다. 이들의 귀에는 그 어떤 바른 말도 들릴 수가 없는 것으로 본다. 오직 하나 외길은, 그들이 지향하는 것과 같은 북한체재가 북한자체가 꿈꾸고 개발한 핵무장 때문에 멸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말고는 없는 것으로 본다. 정치와 군사력은 경제가 있고서야 성립되는 개념임을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말이다. 2017년의 역사는 이것이었다. 목적이 정당하면 수단과 방법은 어떤 불법 부정이라도 상관 없다는 종말주의의 역사였다.
글: 김규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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