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원=박상후 칼럼니스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통일한 뒤 등장한 에도막부는 흔히 소비와 문화가 발달한 태평성대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다. 거친 전란에서 벗어나 상당기간 평온한 상태가 유지됐으니 그리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에도 시대를 한 꺼풀 벗겨보면 일본사의 암흑기로 평가하는 일본 역사학자들도 많다.
에도시대를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학자들은 3대세습의 북한과 비교한다. 에도에 자리 잡은 세습권력의 쇼군이 김정은과 닮았고, 가난하지만 에도의 소비와 다른 지역에 비해 발달한 문화에 만족해한 일반 백성들의 모습이 혜택 받은 소수의 평양시민과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쇄국정책을 유지하면서 대내적으로는 강력한 경찰력과 잔혹한 형벌, 치밀한 밀고 시스템으로 통치하는 것도 비슷하다.
또 식량사정이 열악한 북한과 여러 차례의 대기근으로 수십만명이 아사했던 에도시대의 살풍경도 오버랩되는 부분이다.
일본 사학자들은 메이지 시대가 에도와 다른 점으로 아사자(餓死者)가 거의 사라졌다는 점을 꼽는다. 에도 시대에는 덴메이(天明) 덴포(天保), 쿄호(享保)대기근이라 불리는 사태로 수를 헤아릴수 없는 아사자가 발생했다. 덴메이 대기근으로는 전국에서 30만에서 50만으로 추정되는 아사자가 나왔고 히로사키번(弘前藩)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졌다는 통계도 있다.
쿄호(享保) 대기근 당시 마쓰야마번(松山藩)에서는 3월에는 기후불순, 6월에는 병충해로 난리가 났다. 성 밖의 농민들은 먹을 게 없어 살려달라고 몰려들었고 7월에는 아사자의 시체가 넘쳐났다. 하지만 서민들은 구제 대상이 아니었고 비축식량은 상인들이 매점매석했다.
대기근 당시 아사자가 발생하지 않거나 그 수가 적은 번(藩)은 선정을 베푸는 것으로 칭송되기 때문에 다른 번으로 양식이 나가지 않도록 막았고, 다른 번에서 몰려오는 난민은 번의 경계 밖으로 내쫓기 일쑤였다.
에도시대 일본은 식량이 부족해도 해외에서 식료품을 수입할 수도 없었고 전국적인 물류 유통시스템도 발달돼 있지 않아 대기근이 발생하면 속수무책이었다.
에도 시대의 인프라도 북한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일본 에도 시대에는 사실 마차(馬車)가 없었다. 일본 역사극을 자세히 보면 마차가 등장하지 않는다. 막부가 마차를 허용한 것이 대정봉환(大正奉還)바로 전년이었기 때문이다. 승마도 군사용이나 긴급연락용도로만 쓰였을 뿐이다.
도로나 수운(水運)도 에도 시대에는 형편없었다. 일본역사에서 도로와 수운을 중시했던 인물을 오다 노부나가 정도였다. 기후와 쿄토 사이에 새로운 우회 도로를 만들고 비와코에 큰 배를 띄웠지만 그때뿐이었다,
에도 막부는 도로와 수운에 있어서 아주 폐쇄적이었다. 니시쿠니(西國)의 다이묘가 배편으로 에도를 공격할 것을 경계해 1609년에는 모든 다이묘가 500석 이상의 배를 갖는 것을 금지했다. 상선은 1천석 정도까지만 허용하고 돛의 기둥은 하나로 제한했다.
우편도 없었다. 민간업자가 하는 히캬큐(飛脚)란 집배원이 있기는 했지만 편지 한통 보내는데 가격도 비싸고 배달도 제때되지 않았다,
에도시대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이 시대가 농본주의에 입각한 가난한 국가로 ‘武士は喰わねど高楊枝(부시와쿠와네도타카요지 : 무사는 곁불을 쬐지 않는다. 선비는 냉수를 마셔도 이를 쑤신다 등으로 의역됨)’라는 식의 실속 없는 정신세계가 풍미해 일견 낭만적인 외피를 둘렀다고 주장한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혹자는 에도시대에 뿌려진 자양분이 메이지 유신의 밑거름이 됐으며 이때 자본주의 맹아가 싹텄다고도 한다. 필자는 모든 관점이 다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역사의 발전을 위해 과거에서 끊임없이 교훈을 끌어내려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일부 일본의 사학자들이 에도시대를 암흑기라 평가하고 이를 현재의 폐쇄적이고 낙후된 북한의 시스템과 연관시켜 분석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고 나름대로의 논거도 있다고 생각된다.
글: 박상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