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원=박철민 칼럼니스트) 지구상에 당면한 많은 문제 중에서 인성과 환경 문제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인구의 증가로 인한 식량의 부족과 주택문제, 급격한 산업 중심주의가 초래한 대규모의 자연파괴는 우리에 삶에 원천을 제공하는 공기와 물의 감소는 물론, 무분별한 생태계의 교란을 가져왔습니다. 이 모두가 지구상의 유일한 고등동물이라 자부하는 인간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며,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는 자연환경의 무차별적인 훼손으로 인한 기아와 물과 식량부족으로 인해 오히려 환경파괴의 주범인 인간의 생활이 위협받기에 이른지 오래 됐습니다.
나는 보릿고개가 한층 기승을 부리던 60년대,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 논농사를 시작한 곳인 김포평야의 끝자락에서 태어나, 누구보다도 맑은 공기와 천혜의 자연조건 속에서 햇살 머금으며 자랐습니다. 봄이면 들판곳곳 들꽃들과 진달래, 개나리, 들매화향기 맡으며 모판과 논물 대는 논배미 사이로 그윽이 피어나는 아지랑이를 감상했습니다. 여름에는 장마 후 불어 오른 시냇가에서 벌거벗고 멱을 감으며, 보뚝 깊숙이 손을 넣어 맨손으로 넙치, 송사리, 메기를 감아 올렸습니다.
웅덩이를 퍼 건져 올리던 미꾸라지들, 오곡백과 무르익은 가을이면 들판곳곳 황금물결의 향기 맡으며 배, 사과, 감등 과일 서리에 밤새는 줄 몰랐고, 들판 이삭줍기하는 겨울이면 쌓아놓은 벼 낫가리 양지 틈에 모여 썰매로 얼음을 지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간혹 바람 빠진 배구공에 짚 풀을 넣어 얼음 축구하다가, 언 몸 녹이려 들판을 태우다 산으로 옮겨 붙은 불길이 있었지요. 그 불길을 고무신 차림으로 부랴부랴 끄던 어릴 적 기억들은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사생화로 남아 있습니다.
“잘살아보세” 하는 새마을운동의 노래구호와 함께 시작됐던 이 땅의 산업화는 경제의 활성화와 절대빈곤에서의 해방이라는 긍정적 결과로 세계 속에 한국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1차 산업의 축소와 2, 3 4차 산업의 급속한 발전은 무분별한 산림과 절대녹지의 파괴, 그리고 편법을 사용한 농지지역의 주거지역으로의 변경 등을 통해 자연훼손은 물론 인간성까지도 상실되는 부정적인 결과 또한 양산했습니다. 동물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살상을 하지만 인간은 때로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으로, 때로는 탐미(?)적 갈증으로, 또 때로는 이유 없는 싸이코적 기질로 훼손하고 상실합니다.
21세기가 열린지도 오래 되었고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생각과 가치의 패러다임이 꿈틀대고 있지만, 정경유착 및 부정부패를 자행하여 이 산하의 대부분을 유린하는 주범인 정치권과 그에 기생하는 범 정치권 인사들만은 그 변화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편 가르기 문화는 제로섬(Zero sum)으로 시류의 흐름에 따른 극한의 인간형만을 지속적으로 양산하고 있으며, 지역감정과 전 사회의 부패지도는 이미 회복불능의 상태에 이른지 오랩니다. 당연히 사회의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었던 人性은 바닥 장세를 지나 땅굴을 판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은 모두 알고 있는 우리사회의 불편한 진실입니다.
나 한 사람 내 한 가족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살고 있는 사회입니다. 개인적인 성향이 주류인 서구의 더치페이(Dutch pay:영국과 네덜란드의 경쟁에서 촉발한 단어)는 따지고 보면 타인의 사정을 배려하는 미덕입니다. 우리의 한 턱 문화 또한 드러냄보다는 사정이 나은 사람의 배려 심에서 출발한, 건강한 공동체의 선善의 문화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 관념이 달라졌고, ‘더치페이’와 ‘한 턱’의 소중한 의미도 공중분해 되었습니다. 서둘러 회복해야 합니다. 착한 민족 고유의 품성인 인성을 살리고 환경의 중요성을 배양하고 나락으로 떨어진 교육의 올바른 가치도 세우며,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의 바로미터(barometer)를 건강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려웠지만 서로 도우며 살았을 때의 도타운 정을 회복하고, 힘겨운 수술이지만 날카로운 메스로 우리사회 구석구석에 똬리 튼 암세포를 긁어내야 합니다. 기존의 사회조직이 병들거나 나르시즘에 빠져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무장된 신규철도를 부설해야 합니다. 사회의 마지막 보루였던 시민사회는 이미, 정치권이나 개인욕망의 분출창고로 가는 예비군으로 전락된 지 오래 됐습니다. 지금 이 사회는 기존의 그 어떤 조직으로도 감당하기 힘들만큼 악취 나는 암세포들로 인해 강토 전체가 신음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서 애꿎은 민초들과 나라의 환경은 점점 더 병약해지고 사회의 근간은 이미 무너져 버렸습니다.
더 좋은 상태로 나가자는 발전(發展)의 순수한 의미가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면 그 사회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포화상태인데도 방치하거나 묵인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대한강토 전체로 보면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그리 적지 않은 면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반쪽으로 갈라진 땅은 참으로 보잘 것 없고 작습니다. 이 작은 공간에 5천 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이민족들이 군거하다보니 모든 것이 과다합니다. 모든 정부 조직에도 과다한 인원들이 넘치고, 무슨 통일을 먹고 사는 사람들, 일제를 먹고 사는 사람들, 독도를 외치며 사는 사람들, 인권을 무기로 사는 사람들, 시민단체를 표방하며 정부보조금을 요리하는 사람들 등등 가지가지로 질펀합니다.
그러한 모든 사회의 주류들이 사회의 통합을 외치고 나라의 통일을 영원하지만, 정녕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절실한 믿음을 가지고 피를 토하는 사람을 저는 본적이 없습니다. 어릴 적 우리 산하에 아무렇게나 나고 피는 온갖 종류의 먹거리와 꽃잎화전을 부쳐 먹으며 성장한 우리 기성세대가 이제 남은 생애에 이루고 가야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인성의 회복과 사회적 대통합, 그리고 아직도 열악한 이 나라의 환경을 돌려놓는 일일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오로지 <나와 내 가족을 위하여>라는 측은지심(?)의 어용으로, 더불어 사는 사회의 윤리와 가치관에 대못을 박고 살 것입니까. 박을 용도가 아니라 대못을 뽑을 용도만으로 만들어진 장도리는 언제나 마련할 수 있을는지요.
“욕망의 내려놓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욕망을 제어하기는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며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목보다는 서로의 못난 얼굴을 보고 너털웃음을 넉넉하게 웃을 수 있는 건강한 사회는, 나의 작은 의식변화에서 출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