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다보면 평생토록 함께 하는 것도 있고, 인생길 어디쯤에선가 슬쩍 두고 가는 것도 있습니다. 누구나 한두 개는 비장(秘藏)하는 애장품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영원히 비밀인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이 존재합니다. 누구는 모두 버리고 가라 하고, 누구는 세상에 버릴 건 하나도 없으니 알아서들 챙기라고 합니다. 저는 아마도 후자인 것 같습니다. 말은 버린다 버린다 하면서도 하나 버리지 못하고 안에다 쌓아두고 삽니다. 비울 땐 비우고 챙길 것만 챙겨야 하는 게 인생이라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만, ‘그때그때 다른’, 그 ‘때’를 제대로 포착하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나이들수록 때로 쉬운 것 같으면서도 종내 어려운 이치가 거기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제게도 평생 같이 가는 게 있고, 도중(途中)에 하릴없이 내려놓은 게 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미련 없이 버렸던 것이, 황망(慌忙)중에 일목요연(一目瞭然), 불현듯 다시 나타나서 평생을 같이 하자고 조를 때가 있습니다. 젊어서는 아예 없었던 일입니다. 나이 들어 갑자기 닥치는 일이라 대략 난감, 난감막측(難堪莫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덕수궁 옆 정동길이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정동(貞洞)길에 얽힌 사연부터 말하는 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 청 들고 제 발로 정동길을 처음 밟은 게 지금부터 근 50년 전의 일입니다. 아득한 옛날입니다. 고등학교 입학을 코앞에 둔 때였습니다. ‘도적처럼’, 그리고 ‘하늘에서 내린 두레박처럼’, 학업을 계속 잇게해 준 온 종친회 장학금을 받기 위해 저는 12시간 내내 기차를 타야 했습니다. 남해 바다를 면한 마산의 우거(寓居)에서 서울로 오는 기차 시간은 그렇게 길었습니다. 새벽에 도착한 서울역 근처 다방에서 계란 노른자를 얹어주는 모닝커피를 한 잔 마시고 종친회 사무실이 있다는 곳을 물었습니다. 덕수궁을 찾아서 그 옆 돌담길을 따라서 쭈욱 가라고 했습니다. 남대문을 지나 그저 크게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그럴듯한 궁궐문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여기거니 하고 궁궐 담장을 끼고 올라갔습니다. 과연 그 길 끝에서 종친회 건물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건물주인이었던 종친회장님은 ‘니가 첫 번째다’라며 제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고등학교 3년을 무사히 다닐 수 있는 든든한 후원자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기적이 있다면 별 수 없이 그런 식일 것입니다. 그 한 달 전만해도 저는 학업을 포기하고 어딘가에서 하우스보이라도 하면서 학비를 마련해야 되는 신세였습니다. 형편 상 형과 나, 둘 중의 하나는 학업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형은 1년만 더 다니면 졸업이었습니다. 당연히 제가 양보해야 했습니다. 우울했지만 달리 선택할 경우의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담담하게 ‘운명’을 받아들일 뿐이었습니다. 기분전환 삼아 목사님 댁에 가서 헌 신문지들을 얻어와 방 도배를 하거나(교회에서 더부살이를 할 때였습니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기에…’, 같이 누워서 흘러간 가요나 부르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기분전환용으로 시공했던 그 도배행사가 제 팔자를 고쳤습니다. 도배지로 쓴 헌 신문지에서 형이 종친회의 장학생 모집 광고를 발견한 것입니다. 언뜻 봐서는 도저히 캡처할 수 없었던 한자투성이의 암호를 형이 용케 수신(受信)해서 끝내 그 비밀문자를 해독해 내었던 것입니다. 흔히 종친회의 이름은 그 성씨의 유래와 관련된 고사(故事)를 원용해서 작명하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우회적인 표현은 문자 속이 깊지 않아 그 고사를 모르는 타성바지들에게는 풀기 어려운 암호와 같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었던 형이 어떻게 그런 ‘가문의 영광’을 용케 알고 있었습니다. 그 모집 광고가 전국에 있는 ‘가난한 후손’들에게 전하는 종친회의 ‘생명의 말씀’이라는 걸 형이 읽어냈습니다. 형이 그 암호를 해독한 덕분에 제 삶은 탄탄대로로 그 첫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그 ‘탄탄대로’의 첫 번 째 이미지가 바로 정동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저는 제 인생이 그렇게 암울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정동길이 제대로 된 그림으로 제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습니다. 여명(黎明)의 낯선 땅,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들, 말로만 듣던 서울, 아직도 실감나지 않았던 구사일생, 그리고 여전히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내 신세. 그런 것들이 어린 저에게 주변의 풍경을 제대로 주워담을 수 있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앞만 보고 걸었을 뿐입니다. 길이 목적지에 이르는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그 자체로도 무엇이 된다는 ‘알쓸신잡식 잡념’ 따위는 애초에 없었습니다. 과정이 사실은 전부라는 교과서적인 인식 같은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 당시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고요. 당연히 그 길이 ‘서울시 서대문구 정동 22번지’(나중에 중구로 이관)에 나오는 그 ‘정동’길이라는 것도 알 턱이 없었습니다. 그저 서소문 몇 번지 **빌딩(종친회 사무실 주소)으로 통하는 골목길로만 알았습니다.
한편, 저는 본의 아니게 오랫동안 ‘서울시 서대문구 정동 22번지’에 시달려 온 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것은 우리 가족의 본적지 주소입니다. 보통 본적지라면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곳’, 아니면 ‘아버지의 고향’ 정도가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 주소가 ‘긍지의 표상’이 된다면 금상첨화이겠습니다. 그런데 ‘정동 22번지’는 그런 원관념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기호였습니다. 이를테면 기의는 없고 기표만 남은 ‘텅빈 시니피앙’이었습니다. 그러나, 내용도 없는 그것이 제게는 꽤나 위세를 부리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최초의 ‘시니피앙 등록’이라는 현상이 그것과 저 사이에 존재했던 것입니다. 영락없는 족쇄였습니다. 일이 있을 때마다 문서 따위에 매번 그것을 적어야 했는데(얼마나 많이 적었던가!), 그때마다 저는 꼭 ‘오페라의 유령’이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듣기는 좋지만 모종의 상처를 환기시키는 기표였습니다. 피난민, 가난, 정체불명, 소외, 불안… ‘서울시 서대문구 정동 22번지’와 함께 하는 그것들은 항상 저를 근원결락강박으로 몰고 갔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라디오나 TV를 통해 그것이 얼굴을 내밀 때마다 소름이 돋았습니다. 지금은 경향신문사 주소지만 그때는 문화방송 주소였습니다. ‘보내주실 곳’ 등의 명목으로 거의 매일 그것과 대면해야 했습니다. 연전에 그 ‘서울시 서대문구 정동 22번지’에 얽힌 고사를 적은 것이 있어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정동은 내겐 좀 특별한 곳이었다. 이를테면, 정동길은 한 때 내 고향이던 곳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때 내 고향의 이미지를 구성했던 곳이다. 유년기 때는 막연히 ‘본적’이라는 것이 고향을 뜻하는 것이라 여겼고, 사춘기 때는 종친회 장학금으로 나를 묶어둔 곳이었다. 그런 것을 두고 누구는, 원초적 억압에서 비롯된 최초의 시니피앙 등록(signifiant registration)이라고 했던가? 어릴 때 생성된 핵심적 기표들은 평생 동안 주체를 지휘 감독 간섭한다고 라캉은 말했다. 그래서 정동길은 지금도 나에게 만만치 않은 간섭을 행한다. 아버지가 거기서 어떻게, 무슨 생각으로 이남에서의 본적을 만들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무렵의 일에 대해선 오직 어머니의 간접진술밖에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아침에 방 밖으로 나오니 옆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다 들리더라. 홀애비 혼자 사는 집에 웬 색시냐는 거지. 내 그때처럼 황망할 때가 다시없었단다.”
피난지 제주도에서 서울로, 살 근거지를 마련하겠다고 올라간 아버지는 해가 넘도록 편지 한통 없이 감감 무소식이었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혼자 버티던 어머니는 아이들을 이웃에 맡기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만 해도 제주에서 서울까지 가는 길은 그야말로 ‘엄마 찾아 삼만리’였다. 사흘 밤낮으로 물어물어 찾아간 서울 거리가 또 만만하지를 않았다. 전쟁이 막 끝난 직후라 아직 서른도 채 안 된 젊은 여자 혼자서 다니기에는 벅찬 거리였다. 어머니는 온 서울을 헤매다 결국 만나지 못하고 밤길에 인천까지 가서 ‘판사 할아버지’가 혼자 기거하던 관사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외할아버지의 이복동생인 ‘판사 할아버지’는 외가 쪽에서는 유일하게 이남에서 현달한 혈육이었다. 나이차가 별로 없어서 어머니에게는 삼촌 겸 오빠였다. ‘판사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여기저기 수소문을 넣고 해서 간신히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난 것은 사흘을 그렇게 헤매고 나서였다. 아버지는 양아치처럼 그 또래의 부랑자들과 함께 영국대사관 근처에서, 그러니까 지금의 정동길에서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고 했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몰골도 험악하기 그지없어서 어머니는 아버지를 데리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나를 낳았다.
어쩌면, 아버지가 부랑자의 모습으로, 그 쓸쓸하고 막연한 정동길에서, 1년여 동안 비바람을 맞으며 버틴 모진 세월의 그림자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나에게로 유입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면, 정동길에서 느끼는 내 감회는 좀더 연원이 깊다. 그것은 내 경험의 기원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는 것이다. 길바닥에 그냥 내려놓은 것치고는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 든다. (졸작, 「물텀벙 대동강」중에서)
위의 소회는 소시적에 제게 소박을 맞았던 정동길이 노년에 가로늦게 등장해 마치 본처 행세를 하는 듯한 기분이 반영된 것이라 어느 정도는 감상적인 어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허세가 빠진 뒤의 허전한 물색(物色)이 완연하다 할 것입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형의 몰락이 가시화된 후 저는 아버지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오직 제가 살 길이라는, 근거 없는, 그러나 제어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몰라도 속으로는 아주 냉혹하게 그 주문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가 호주로 되어 있는 ‘서울시 서대문구 정동 22번지’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버렸습니다. 본적을 신접살림 주소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그 주소를 잊고 살아왔습니다(몇 년전에 그 근처에서 모종의 국가고시 출제에 참여하면서도 별다른 감회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서울시 서대문구 정동 22번지’를 아예 내 기억 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리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아, 한 번 살가운 정을 느낀 적이 있기는 했습니다. 동화은행이었던가, 이북5도민들에게 특혜가 되는 주식을 배당한다는 말이 있어서 그쪽으로 본적(원적) 조회를 한 번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아마 얼핏 그 주소에서 ‘혈육의 정’을 잠시나마 느꼈던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공문서를 한 번 작성할 일이 있었습니다. 본적지 적는 난이 공식 서류에 없어졌다는 말은 오래 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름도 생소한 ‘등록 기준지’라는 게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뜻을 몰라 우왕좌왕 했었는데(그래서 저는 어이없게도 거기다 직장 주소를 썼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옛날의 본적지 적는 곳이었습니다. 등록 기준지라니, 결국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자신을 최초로 붙들어 매었던 공간에 대해, 그 공간에 부착되어 있는 역사적 기록들에 대해 쓰라는 말이었습니다. 아마 그 ‘등록 기준지’라는 말이 결정타였던 것 같습니다. 오락가락하던 제 마음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정동길이 대놓고 나대기 시작했습니다. 정동길 답사도 우정 다녀오게 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처음 등록된 곳을 다시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노골적으로 들었습니다. ‘정동길’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쓰는 것도 결국은 그 억누를 수 없는 ‘최초 등록지의 추억’을 달래기 위한 한 마디 궁여지책이라 할 것입니다.
글: 양선규/소설가 대구교육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