歲暮喜鵲
이맘때가 되면 거리에 크리스마스캐롤이 요란하고, 뭔가 재미있는 일을 꾸미는 젊은이들의 잰 발걸음이 사방으로 분주하기 마련인데, 요즘 거리에 나가보면 한 마디로 온통 잿빛이다. 네거리에 자선남비를 걸어놓고 서있는 구세군의 붉은색 롱코트는 허전한 남비와 함께 유난히 처량맞다.
구세군의 붉은색 자선남비를 보면서 떠오르는 것은, 그 옛날 우리 자녀들 어릴 적에 털모자와 스웨터를 풀어서 새로 떠 입히고 짜장면 외식이라도 하려고 거리에 나왔다가, 딸랑거리는 종소리에 이끌려 아이들 손으로 천 원짜리 한 장씩 자선남비에 넣게 하고, 그걸 보면서 흐뭇해 했던 따뜻한 정경이지만, 지금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뻘건 코트 등판에 저들 종교와 아무 상관없는 저주의 글자를 새겨넣고, 차꼬를 풀어주어서 모두를 자유롭게 하라시던 이의 뜻에 합당치 못한 일을 해놓고, 그짓을 한게 바로 어제인데. 지들이 뭘 했는지 까많게 잊고서 어디를 향해 흔드는지 모를 무심한 종소리가 영 낯설고 보기 썰렁하다.
나이를 먹어가며, 지난 일을 더듬되, 가급적 흐뭇했던 일들을 기억하며 살라고 한다. 아프고 쓰라린 것에 염장이 되다시피 절어서 살았으니, 회억이라도 좋은 것만 하라는 뜻이리라.
그 시절의 다방이나 대포집을 떠올리면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뽀얗게 무한정 뿜어대는 담배연기, 어찌나 많이 피워 대던지 기억 속의 얼굴들도 모두 자욱한 담배 속에서 떠오를 지경이다. 일년 중에 통행금지가 없는 세모의 날은 젊은이들에게 뭔가 보너스를 받은 듯, 뭔가 짜릿한 일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대와 설렘으로 들뜨는 그런 맛이 있는 날이다. 허나 그해에는 재수가 옴이 붙었는지, 크리스마스든 년말이든 촐촐하고 적적하기 그지 없었다.
어찌하다보니, 술은 한 잔 걸쳤는지 말았는지, 친구와 둘이서 밤늦게까지 다방에서 죽치다가(성냥개비만 많이 분질러 먹는다),
올해 망년회날(그때는 년말을 그렇게 불렀다)은 영 썰렁하구나, 시간도 늦었으니 집에나 가자
밤늦은 시간, 잔설이 바람에 날리는 추운 거리를 걸어서 자취방으로 향하는데, 저 앞에 낯익은 꼬마녀석이 추위로 잔뜩 움츠린 자세로 아는 체를 한다. 다방이나 술집으로 다니면서 껌을 파는 꼬마인데, 자주 마주치는 사이다.
“너 여태 집에 안가고 뭐하냐?”
“ 버스를 놓쳐서 집에 못가요. 아저씨 나 좀 도와 줄래요?”
“뭘 도와줘?”
“ 나 이 안에 들어가서 잘 거니까, 이 구루마 좀 들어주세요.”
꼬마가 가르키는 자리에는 나무로 짠 구루마가 있었다. 손수레꾼들이 일이 끝나면 바퀴(쇠축의 양 끝에 베아링과 자동차바퀴를 부착해서 만든)는 도난 당하는 일이 있기에, 떼어서 집안에 보관하고, 목재로 만든 몸체는 벽에 기대어 세워놓거나, 뒤집어 뉘어놓거나 한다. 꼬마는 뒤집어 뉘어져 있는 구루마 안에 들어가 자겠다는 것이다. 영하 10 도가 넘는 추위다.
“ 아니, 이렇게 추운 날씨에 여기 길에서 잔다는 말이냐? ”
“ 괜찮아요. 버스 놓치면 이런 데서 늘상 자요. 어서 구루마나 들어 주세요.”
친구와 나는 엉겁결에 구루마를 들어 주었고, 꼬마는 안에 들어가 누으면서
“아저씨, 고마워요.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구루마 안에서 또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친구와 나는 좀 당황스런 기분에 발길을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친구가 대뜸
“ 야, 재 데려다 재우자.” 하는 게 아닌가.
구루마를 다시 들어올리고, 친구가 애를 반짝 들어 낸다.
“인마, 어서 나와. 여기서 자면 얼어죽어, 아저씨들 따라와 ~”
소년은 10살, 학교는 안 다니고, 변두리에서 아버지와 동생과 움막에서 사는데, 시내에 들어와서 종일 껌을 팔고 다닌다. 우리 짖궂은 친구들이 껌도 안 팔아주면서, 종종 데리고 장난도 치고
말대거리 하던 사이라, 꽤 친숙하다.
“ 껌 팔아줄게, 노래 하나 해볼래?”
“ 정말이요? 장난아니지요? ”
“ 그래 인마, 잘 부르면 두 개 팔아줄지도 몰라.”
심심풀이로 말장난을 시키면,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그대 오기를 기다려 봐도~~”를 곧잘 불러대곤 했다.
“ 저기 두 번째 테이블에 앉아있는 아가씨한테 가서 여기 잘 생긴 아저씨가 주더라고, 이 메모지 좀 전해줘라.~~” 해서 수줍음 많이 타는 친구를 놀려주는 데에 써먹기도 하고… 그래서 어쩌다 안 보이면 그 녀석 안보이니 심심하네 하던 아이다.
추운 밤거리를 헤치고 나의 자취방에 돌아와, 연탄불을 갈고 불구멍을 열어서 방을 따듯하게 하고 셋이 잘 잤다. 꼬마를 아랫목에 뉘었는데, 아침에 보니 친구가 꼭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아침에 나는 부엌에서 밥을 앉히고, 아끼던 꽁치 통조림을 까서 김치찌개를 준비했다. 마당에서는 친구가 더운 물을 퍼다가 꼬마에게 세수를 씻기는지 시끌한 소리가 들려온다.
“ 인마, 빨리 머리 갖다 대, 머리가 이게 뭐야? 까치가 열 마리는 들어가 살게 생겼어. 머리 감겨 줄테니까 빨리 대라구,“
“ 싫어요. 안 감아도 되요~~얼굴만 씻을래요.”
싱갱이가 시끄러운데, 주인 아주머니가 내다 보신다.
“ 잘 아는 꼬만데, 어제밤에 늦어서 데려다 재웠어요.” 했더니
“ 잘 했어요. 올해는 집안에 좋은 일이 생기겠네~” 하면서 의외로 반색을 하신다.
잘 씻기고, 넉넉하게 해놓은 쌀밥을 배불리 잘 먹고 나니, 꼬마가 집에 가야겠다고 한다.
“인마, 오늘은 세상이 다 空日이야. 껌장사도 안돼, 여기서 놀다가 내일 가~”
“ 아니어여. 아버지가 기다리셔요. 가봐야 해요. 갈께요.”
그러면서 껌을 한 통 내놓는다. (셀렘민트인가 은단껌인가 파란색 겉딱지였다)
“ 이거 아저씨들 드릴께요.”
“ 하하, 녀석 인사성은 있네, 그래, 고맙다. 아껴서 잘 씹을 게~~ ”
새해 아침이 밝았지만 할 일없는 우리는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잠을 잤다.
그때 그 친구는 내게 며칠 유하러 와 있었으며 럭비를 하던 친구였는데 성격이 사내답고 시원시원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그 친구가 없었으면 선뜻 그애를 데려다 재웠을가, 글쎄다.
歲暮가 되면 생각나는 두 사람 덕에,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그때 그 꼬마와 지낸 하룻밤 덕에 우리의 악독한 죄 중에 한가지는 지워지지 않았을까, 시건방진 생각을 해본다.
껌팔이 소년 이x백군, 지금은 성공해서 잘 살고 있겠지?
아마 귀여운 손자들 재롱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뽀얀 담배 연기, 레지아가씨의 미니스커트, 허옇게 막걸리 자욱이 묻은 물들인 미군작업복… 그리운 시절, 그리운 얼굴들, 이맘때면 유난히 그립다.
새해에 복많이 받게나,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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