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원=이동진 기자) 시립목동청소년센터(센터장 이옥화)은 4일(금)부터 10일(목)까지 서울시 잠실 종합운동장 등 69개 경기장에서 ‘제100회 전국체육대회’과 관련하여 청소년 캠페인 활동을 전개한다.
시립목동청소년센터는 서울시자원봉사센터의 후원으로 서울시 내 청소년시설 중심의 지역 캠페인을 통한 전국체전 및 청소년 자원봉사의 관심도 향상시키고 다양한 형태의 붐업 캠페인 및 지역 연계를 통해 캠페인 활동을 전개하여 각 지역별 경기장별 진행되는 경기종목 알림으로 시민 참여를 활성화하고자 청소년의 자발적인 캠페인 활동을 전개한다.
서울은 전국체전 최초 개최지로서 100년의 상징성을 기리고 미래 100년의 출발점이라는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제100회 전국체전을 유치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체육사의 한 획을 긋는 제100회 전국체육대회를 수도 서울에서 개최함으로서 전국체전 100년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고, 각종 국제대회를 개최 할 수 있는 체육 인프라를 구축함으로써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의 균형발전 및 세계 스포츠 중심 도시로의 재도약을 준비하는 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전국체육대회는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가 창설된 후 그해 11월에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개최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기원으로 삼는다. 조선체육회 출발 초기에는 단일 종목별 경기대회를 개최해 나가면서 체육활동의 폭을 넓혀나갔다. 대한민국에 종합경기대회가 등장한 것은 1925년이었다. 그해 성동원두에 경성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이 세워지고, 이를 기념하여 이른바 조선신관경기대회가 마련됐다.
그러나 이 대회를 우리 민족의 체육대회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일본인에 의해 준비되고 운영됐으며, 일본 선수들도 다수 참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민족 종합체육대회의 효시는 1934년 조선체육회 창립 15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전조선종합경기대회라고 보는 것이 옳다. 경기종목은 축구, 야구, 정구, 농구, 육상 등 5개 종목이고 경기장도 경성운동장 외에 욱천운동장(현 선린중 자리), 배재고보운동장, 철도운동장 등 이른바 보조 경기장을 사용했다.
이 대회가 기록상 제15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가 된다. 첫 번째 종합경기대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뒤 이듬해에는 유도, 씨름, 검도, 역도가 추가되고 1936년에는 빙상, 권투, 탁구가,1937년에는 배구가 추가되는 등 대회 규모가 커져갔다. 이처럼 대회가 발전함에 따라 우리의 경기 수준은 나날이 향상되었고, 여기서 기른 힘으로 많은 종목에서 전 일본을 휩쓰는 기개를 보였다. 특히 축구는 일본에 항상 승리했고 육상, 탁구, 럭비 등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항일’이라는 대의의 정신적 승리이기도 했다.
전조선종합경기대회가 절정에 오른 것은 역시1936년의 베를린올림픽을 전후한 2~3년 사이인 듯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황금시대는 일제의 새로운 탄압정책으로 더 발전하지 못하고 좌절됐다. 1938년 조선체육회가 강제 해산당하고 민족 체육이 억압당함으로써 전조선경기대회는 제18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감격은 체육인들에게도 또 다른 환희와 광명을 안겨줬다. 곧 민족 스포츠 대회의 부활로 이어졌다. 그해 11월 조선체육대회가 부활되고 곧이어 12월 초겨울에 자유해방 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인 제26회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광복을 맞은 민족의 기쁨을 표현하는 민족축제로 마련된 이 대회는 한국 스포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뜻깊은 행사였다. 경기종목은 육상, 축구, 야구, 배구, 정구, 럭비, 풋볼, 탁구, 자전거, 승마, 농구 등 10개 종목이었으며 이듬해 1월에는 빙상대회도 부활했고 이 대회가 오늘의 동계빙상 및 동계스키대회로 발전됐다. 1946년부터는 각 경기단체들의 조직이 정비됨에 따라 경기 활동이 본격화됐다. 8.15 해방 1주년 기념대회 이외에 3.1절 경축대회가 잇따라 열렸으며, 1947년 6월 대한올림픽위원회의 발족을 앞두고 제27회 대회는 조선올림픽대회로 불렸다.
이어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제29회 대회가 열렸고 이때부터 조선종합 경기대회 또는 조선올림픽대회 등의 명칭을 전국체육대회로 고치는 등 이제까지의 자유 참가제를 시, 도 대항제로 바꿨다. 따라서 오늘과 같은 향토의 명예를 건 치열한 경쟁은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또한 정부수립과 함께 모든 단체와 행사의 명칭은 대한 또는 한국으로 통일되고, 1949년 선보인 윤석중 작사, 김희조 작곡의 체육대회가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전국대회라는 국가적인 이 행사가 본 궤도에 오르자 체육인들은 놀라운 의욕으로 좋은 기록과 높은 수준의 경기를 보여줬다. 특히 1948년 우리나라 건국 후 최초로 런던올림픽대회 참가를 앞두고 열린 전국체육대회에서는 여러 부문에 걸쳐 우수한 기록이 작성되고 많은 유망 선수들이 배출됐다.
전국체육대회가 틀이 잡힐 무렵인 1950년에는 6.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제31회 대회는 열리지 못했다. 그러나 일제의 질곡 속에서도 용솟음쳤던 체육인들의 정열과 투지는 다음 해인 1951년 전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광주에서 제32회 대회를 치를 정도로 대단했다. 대회의 내용은 빈약했지만 대회 개최의 뜻은 자못 큰 것이었고, 이 소식은 곧 국제올림픽위원회를 비롯한 각국 스포츠계에 알려졌으며, 이에 감격한 세계 스포츠인들은 뜨거운 격려를 보내왔다.
1953년 휴전이 되고 사회가 차츰 안정됨에 따라 체육대회 역시 질적으로 충실해지고 양적으로도 대형화됐다. 그리고 1952년 제33회 대회부터 제37회 대회까지 서울에서만 개최됐던 전국체육대회를 중앙과 지방의 균등한 체육발전을 도모한다는 취지 아래 제38회(1957년) 부산, 제41회(1960년) 대전, 제43회(1962년) 대구, 제45회(1964년) 인천, 제46회(1965년) 광주 등 지방도시에서 열어 스포츠의 전국적인 보급 발전에 이바지했다. 전국체육대회 성화는 1955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36회 때부터 이상백 박사의 제의로 단군성조에 관한 전설과 유적이 많은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채화한 뒤 대회 주경기장까지 봉송하는 제도가 마련됐다.
이번 100번째 전국체전은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의 유기적 통합 그리고 생활 체육의 저변 확대 필요성에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은 전 세계적으로 국가 단위의 스포츠 종합대회가 100년의 역사를 가지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라며 특히 90여개의 스포츠 종목이 보급되어 있는 우리나라는 세계 체육사적인 측면에서도 스포츠의 가치를 가장 의미 있게 보급하는 모델로 전국체전과 같은 대회가 주요하게 작용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