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민 에세이] 겨울일기 5

출처:페이스북 심재용작가

2020년 1월도 5일이 지났습니다. 제가 1964년 6월 19일 생이니 태어나 꼬박 20,288일을 살았습니다. 6일이 ‘대한이가 놀러 왔다가 얼어 죽은’ 소한(小寒)이지만, 이미 열대의 기온을 점령한 이 나라의 겨울은 볼을 빨갛게 얼릴 정도의 시절로 돌아가길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 30년 전쯤의 제주도나 부산 정도의 날씨가 중부권의 요즘 날씨지요.

며칠 전 하루 이틀쯤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체감온도가 어깨를 밟고 지나가긴 했지만, 지금의 겨울에선 간혹 북극의 ‘오로라’도 부르던 한파는 온난화로 녹아내리는 빙산의 눈물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그저 한두 번의 추위 정도가 지나가면, 꽁꽁 언 땅을 입김으로 녹이며 어린싹들이 고개를 치켜들 날도 멀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같이 스키니 스노보드니 하는 겨울 스포츠가 발달한 시대의 겨울은 새로운 활력과 즐거움을 전해주는 계절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우리에게 겨울은, 추위에 얼어붙은 손에 상흔처럼 붙은 쩍쩍 갈 라진 동상 자국만으로도 그리 반가운 계절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갈 때까지 지치던 썰매와 뚝방에 번지던 들불 속 감자나 고구마만으로도 풍요의 기억은 아름다웠지만, 그 시절의 겨울은 귓자락을 간질여오던 샹송의 감미로움 같은 낭만과는 거리가 먼 이방(異邦)이었지요.

그래요. 예전처럼 인동지절(認冬之節)에는 몹시 추웠고 귓볼을 에이는 찬바람과의 사투도 만만치 않아서, 군불 많이 지펴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찾아 몸을 던지며 사람을 그리워했고 길 잃은 사랑에도 목말라 했어요. 그러나 ‘앗! 추워추워!’ 하며 아랫목으로 기어들던 우리에게, 개마고원이니 백두산의 영하 3,40도 기온을 상기시키며, 영하 20도쯤의 기온이 무에 그리 대수냐고 일갈하시던 어르신들이 단 한 분도 보이지 않는 지금은, 목말라하던 사랑도 남극이나 북극의 빙하로 슬며시 달아났나 봅니다.

이런,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방향이 빗나가 또 신변잡기가 되었네요. 저 푸르고 너른 벌판에서 인간에게 따뜻함과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기 위해, 오늘도 무공해 풀잎을 한껏 뜯어먹는 순수한 양들의 깨끗한 마음처럼, 흰쥐의 해 저는 지금까지 살아온 낡은 버스표와 같았던 생애를 뒤로하고 새 시대를 준비하려 합니다. 그리고 20,288일을 숨쉬어 온 제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날의 곡예를 즐길지는 모르지만, 이런 남아 있는 나날들이 선사할 그럴듯한 하루하루의 동화같은 예측에, 당신의 동행을 기대해 보는 것도 신선할 듯합니다.

휴대폰이 K-merce나 MONETA 기능으로 3세대 영상(IMT)기능을 거쳐 4세대, 5세대를 넘어 벽걸이 TV를 대신하듯이, 혁신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새로운 세대들은 자신들의 변화 욕구를 물질에 실현시킵니다. 이런 혁신과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맞아 낡은 기성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지만 저도 아주 조금씩이나마 지금과는 다른 희망의 언어를 반려하며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정보통신이 빠르게 진화할수록 ‘느림의 미학’도 고개 들겠지만, 나라는 인간이 느림의 미학을 말하기에는 사실 ‘지금까지 너무 느리게 살아왔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요즘은 우리네 온대성 기후의 변화가 주던 자연의 신비로움이 서서히 사라지지만, 그럴수록 지난 계절을 기억하고 지난 계절을 살던 사람들의 순수함을 간직하고픈 마음은 태산만산을 덮고도 남아 있습니다. 게으르고 느리게 살아온 만큼 활동이 더딘 ‘경제의 돛단배는 언제나 침몰을 준비’하고 있지만, 이미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겨울임에도 겨울을 느끼지 못하는 죽은 시인의 사회 같은 감성의 질곡은,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니까요.

창을 열고 바라보는 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별들도 추우면 방문을 꽁꽁 닫고 아랫목에서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있는 걸까요?

이 밤, 곁에 누워 소록소록 자고 있는 겨울을 깨우지 못하는 소심한 사내의 구부정한 등짝 위로 얼어붙은 바람이 무겁게 떨어집니다.

글:박철민 / 작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