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남침’-동족상잔의 비극, 분단과 대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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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은 소련이 원조한 T-34 전차 200여대와 SU 76 자주포 176대를 돌격대로 하여 전면 공격으로 한국전쟁은 시작되었고, 남북한 군대간의 교전은 모든 전선으로 확대되었다.
북한 주공격은 4개 사단과 1개 전차여단으로 구성된 제1군단이 맡았다. 제3·4사단과 제105전차여단 예하 2개 전차연대는 의정부-서울 방향으로, 제1사단과 1개 전차연대는 문산-서울 방향으로 공격했다. 나머지 6사단은 한강을 넘어 김포-영등포로 진격하게 했다.

조공격은 3개 보병사단과 1개 모터사이클연대로 구성된 제2군단이 맡았다. 이 중 제2,12 사단과 모터사이클연대는 춘천-가평·홍천-수원 방향으로 진격해 서울 동측을 우회 공격, 국군 주력을 포위하도록 했다. 나머지 제5사단은 제766유격연대와 제945육전대의 지원을 받아 동해안 축선을 따라 포항 방면으로 남진하도록 했다.

국군의 전방방어 부대는 4개 사단과 1개 연대였다. 옹진반도에 보병 제17독립연대, 개성·문산에 제1사단, 의정부 북방에 제7사단, 춘천 북방에 제6사단, 동해안에 제8사단을 배치했다. 그나마 북한 남침 전날인 24일 0시를 기해 한동안 계속했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됨에 따라 많은 장병이 휴가와 외박을 나가 부대에 남아 있는 병력은 절반에 불과했다.

주북 소련대사 슈티코프의 개전 전후의 상황에 대한 보고는 북한의 선재 공격 사실을 정확히 확인해주고 있다. 북한의 전면전 개시는 분단 이후 통일 방안의 하나로 굳어진 무력통일 노선을 이행한 것이었지만 선제 전면공격이 가져올 정치적 파급성을 간과한 채 침공을 단행한 것은 그만큼 정권적 차원에서 개전을 더 이상 연기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내전의 형태로 개시된 한국전 양상은 스탈린이 원했던 방식이며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내전형식으로 시작해야 전면전으로 확대시킬 수 있다고 주문한 것이기도 했다. 소련군대의 북한 철수 이후 조선 인민만이 자신들의 뜻에 따라 내정을 해결할 권한을 가진다고 주장해온 점에 비추어보면 소련의 눈에 보이는 개입은 자신의 주장에 모순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소련은 개전의 준비과정에서부터 자국 군사고문들에게 북한 인민군 지휘부의 작전 계획 작성과 부대 훈련 등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스탈린은 자국의 전쟁 개입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에 따라 관련 정보를 인지할 수 있는 인사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소련 최고권력 기관인 당정치국원들 조차도 전쟁 관련 비밀보고 문건들을 보고 받기는 하였으나 정책 결정에는 거의 배제되었을 정도였다.

글: 김동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