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는 작가이고 정신분석은 문학이다. 작가 프로이트의 위대함은 그의 글 속에 드러나 있다. 셰익스피어가 정신분석의 창안자라면 프로이트는 그 해독자였다.”(해롤드 블룸, 『서구의 정전(正典)』)
프로이트가 탁월한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의 글을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타고난 글쟁이입니다. 문학적 감수성이라 하면 먼저 수사적(修辭的) 재능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겁니다. 물론 수사(修辭) 능력도 큰 재능입니다. 잘 읽고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재능, 특히 설명적, 예시적 표현 능력은 노력으로도 어느 정도의 선까지는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 ‘어느 정도’라고 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고도의 문학적 감수성을 타고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것이 재능인지 노력의 결과인지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읽고 쓰는 능력’은 얼마든지 공부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문학적 감수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설명의 범주 밖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척 보면 아는 그 어떤 것’에 속합니다.
성감 발생적 마조히즘은 모든 발전 단계 동안 리비도를 따라가고 그로부터 변하는 정신적 색채를 이끌어낸다. 토템 동물(아버지)에게 잡아먹힐 것이라는 공포는 원시적 구순 조직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싶은 욕망은 그것 뒤에 오는 사디즘적 단계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거세 불안은, 비록 그것이 후에는 부인되지만, 성기기 조직의 침전물로서 마조히즘적 환상의 내용으로 들어온다. 물론 마지막 생식기 조직에서 성교와 출산의 상황이 발생하는데 이것은 여성성의 특징을 이룬다. 마조히즘에서 엉덩이가 차지하는 역할 역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분명하게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별도로 하고서도 그렇다. 엉덩이는 사디즘적 항문기에 성감 발생적 선호도가 강한 육체의 일부분이다. 그것은 구순기에 젖가슴이, 성기기에 남근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다. [프로이트(박찬부), 『쾌락 원칙을 넘어서』, 열린책들, 175~176쪽]
프로이트 자신이 ‘남근(男根)’에서 자유롭지가 못하다는 지적과는 별도로(저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작가들은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이트의 글을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가 만들어놓은 ‘텍스트의 리얼리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공이든 발견이든, 그의 이야기를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글에 의해서 새로운 인간으로 재정비(?)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무엇인가 애매하던 것이 좀더 분명한 것으로 나아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세상은 온갖 소재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것들을 가져다 ‘세계’를 만드는 자들은 오직 작가들뿐입니다. 프로이트는 확실히 그런 ‘작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적 감수성은 훌륭한 정치가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의 덕목’입니다. 그들이 인상적인(기억에 남는) 명언(名言)을 남기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이 내뱉은 한두 마디 촐천살인(寸鐵殺人)의 언사(言辭)들은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홀로 바다 위에 떠 있는 부표가 아닙니다. 기껏해야 위치 표시에 지나지 않을 그런 ‘떠 있고 단순한 것’들이 아닙니다. 거대한 뿌리를 지하(地下)에 두고 있는 지상의 나무처럼 ‘살아있고 복잡한 것’들입니다. 지표면 위로 드러난 것만을 두고 범박한 계산들과 ‘비교의 결례’를 범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원인을 추적당하지 않는’ 일들을(시작을) 항상 추구합니다. 한시도 ‘세계의 구성’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작가이고 정신분석은 문학이다’라는 말이 그러한 것처럼, ‘훌륭한 정치가는 작가이고 진정한 정치는 문학이다’라는 말도 하나의 가능한 명제가 되는 것입니다.
글: 양선규/소설가 대구교육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