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향기롭게” – 길상사

길상사는 우리나라 3 대 요정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원각 주인인 김영한 (1916-1999. 법명 길상화 , 기명 진향 , 아명 자야 ) 이 그 터와 건물을 무주상보시 함으로써 탄생했다 . 법정스님이 발족한 순수 시민모임인 “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 ” 의 근본도량이기도 하다 . 요정으로 사용하던 40 여 동의 건물을 그대로 절집으로 사용하다 보니 건물배치 , 조경 등이 여느 절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 그러한 차이만큼이나 사연도 많다 .

16 세에 기생으로 시작하여 1,000 억 원에 이르는 재산을 기증한 김영한,
그녀의 평생 연인 천재시인 백석,
이곳에서 열반에 든 법정스님 .

경내를 천천히 거닐며 그녀의 나눔 정신과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도 마음의 평안을 얻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 .

땅에는 경계가 있지만 하늘에는 경계가 없다

어디서 봤더라 ?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굽어진 비탈길을 오르니 관음보살상이 나타난다 . 그런데 분위기가 좀 생소하다 . 절 마당에 있으니 당연히 관음상이 맞을 텐데 여태까지 보았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 마치 절 아닌 다른 곳에서 많이 접했던 것 같은 모습이다 . 고개를 갸웃거리며 찬찬히 살펴본다 . 전체적으로는 성모마리아상 같은 분위기다 . 얼굴은 일본대사관 앞에 앉아있는 위안부 소녀상 같기도 하고 , 또 어떻게 보면 한 손을 턱에 괴고 앉아있는 반가사유상 같기도 하다 .

아하 ! 그렇구나 . 밑에 있는 표지석을 보니 의문이 풀린다 . 이 관음상은 법정스님의 의뢰로 한국카톨릭미술가협회장을 맡았던 조각가 최종태교수가 만든 작품이다 . 그는 일찍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분으로 평생 우리나라 소녀상을 조각해왔다 . 그런 그가 만들었으니 그럴 수밖에 .

길상사는 종교 간의 경계를 허문 절이다 . 길상사 개원법회 날 김수한추기경님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 법정스님은 명동성당에서 강연을 할 정도로 친분이 깊다 . 비단 눈에 보이는 관계 뿐 아니라 종교철학도 비슷하다 . 법정스님은 관세음보살과 성모 마리아는 그 상징성이 같다 하였고 , 김수한추기경님은 과거 일본에서도 가톨릭 신자들이 탄압을 피하기 위해 관음상 뒤에 십자가를 그려서 기도한 적도 있다 하셨다 . 이런 연유에서인지 간혹 길상사 관음상 앞에서 기도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

진향과 백석 , 그 안타까운 사랑

신분을 초월한 사랑에 빼놓을 수 없는 게 유학자 서경덕과 기생 황진이의 이야기다 . 조선시대에 그들이 있었다면 현대에는 천재시인 백석과 기생 진향 ( 김영한의 기명 ) 이 있다 . 백석은 한국 현대시 최고시인 5 인 ( 김소월 , 서정주 , 정지용 , 김수영 , 백석 ) 중 한 명이다 . 진향도 조선어학회 회원 , 일본 유학 , 중앙대학교 영어영문과 졸업 및 다수의 책을 출판한 작가다 . 이런 인물들이니 , 유명세로 치자면 이들의 사랑이 서경덕과 황진이의 사랑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할 건 없다 .

이들은 1936 년 백석이 26 세 , 진향이 22 세 되던 가을에 함흥에서 만났다 .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이던 백석이 교사들 회식자리에 참석했고 , 진향이 술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왔다 . 이때부터 이들의 운명적인 사랑은 시작된다 . 함흥과 경성을 오가며 사랑을 나누던 당시 백석은 진향에게 “ 자야 ” 라는 아명을 지어준다 .

기생과의 살림을 용납할 수 없던 백석의 부모는 이들을 갈라놓기 위해 백석을 강제로 결혼시킨다 . 그러나 백석은 결혼식이 끝나기 무섭게 곧장 진향의 품으로 달려온다 . 이러한 과정을 세 번이나 거치게 되자 백석은 진향에게 만주로 뜨자고 제안한다 . 백석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았던 진향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 결국 백석은 만주로 떠나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영원히 이별을 하게 된다 . 그 사연은 백석이 떠나기 전 진향에게 전해준 한 편의 시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

진향도 평생 그를 잊지 못해 < 백석 ,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 이란 회고록을 출간한다 . 창작과 비평사 백낙청에게 거금을 출연하여 “ 백석문학상 ” 도 만든다 . 진향은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펑펑 오는 날 유골을 뒷산 언덕에 뿌려달라고 한다 . 백석의 시 구절 중 “ 눈은 푹푹 나리고 ” 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

무소유와 나눔 , 맑고 향기롭게 퍼지다

길상사 제일 깊은 곳에 진영각이 있다 . 법정스님의 영정과 유품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 무소유의 삶을 살다 이곳에서 열반에 드신 분답게 남겨진 유품 또한 소박하기 그지없다 . 특히 아주 좁은 화단에 “ 법정스님 유골 모신 곳 ” 이란 문구 옆의 초라하게 보일 정도로 작은 석물을 보면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 그러나 그가 남긴 향기는 지금도 은은하게 온 세상에 퍼지고 있다 .

김영한 또한 이곳에서 육신의 옷을 벗었다 . 어쩌면 그의 삶은 운명같이 이름대로 살다 간 것 같다 . 아명 ( 雅名 ) 자야는 이태백의 시 “ 자야오가 ” 를 차용하여 백석이 지어준 이름이다 . 자야오가는 전쟁 나간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심정을 그린 노래이니 , 평생 백석을 그리며 지내던 그녀의 심정과 다를 게 뭐가 있으랴 . 자신이 운영하던 대원각 ( 大苑閣 ). 한자는 다르나 “ 광대하고 완전한 깨달음으로 부처님의 지혜 ” 를 뜻하는 대원각 ( 大圓覺 ) 이 있다 . 술과 여자 향락이 가득했던 자리를 부처님의 법음을 전하는 청정도량으로 만들었으니 이 또한 큰 깨달음이 아니겠는가 .

한 사람의 마음이 맑아지면 그 둘레가 점점 맑아져서 마침내는 온 세상이 다 맑아질 수 있다는 법정스님 .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에서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게 소원이라던 김영한 . 나무그늘 아래서 평화롭게 쉬고 있는 시민들의 마음속에도 메아리의 진동이 느껴졌으리라 . 아직도 코끝에는 이들의 향기가 묻어있다 .

글 / 사진 엄태성 ( 연대 여행작가 . http://cafe.naver.com/yst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