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대찰 이란 말이 있듯이 삼천리 금수강산의 최절경에는 아름다운 사찰이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이 전진으로 부터 서기 372년 불교를 받아 들인 이후 우리 역사와 불교의 역사는 함께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는 통일신라시대로 부터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 개국에 이르기까지 국교로써 선조들 삶의 가치의 기준이 되었다. 근세에 이르러 모진 박해와 고초를 견디어 내고 뿌리를 내린 천주교 기독교와 함께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정신적 지주라 할 것이다.
신앙과 종교적 신념에서 한걸음 벗어나 삼천리 금수강산의 가장 아름다운 곳에 자리한 명산대찰 100곳을 찾아 지난 시간과 오늘의 모습을 견주어 본다.
영욕의 시간은 1000년 넘어 만년을 이어 가는 것…
그 속의 영과 욕의 자취를 함께 읽어 볼 요량이다.
전라남도 화순 만연사
광주에서 지척인 전라남도 화순에 위치한 만연사는 명산대찰이라 부르기에는 안스러움이 있다. 높고 깊은, 이름 높은 명산의 자락에 터를 잡지도 않았으며 절의 규모가 대단스럽지도 않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만연사는 1208년 고려 희종 당시 선사 만연이 창건한 이후 대찰로 기록되어 있으며 중세와 근세 우리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 있는 절이다.
5월 1일 관광주간의 첫날 찾은 만연사는
‘만산 홍화’라는 이름을 떠올려야 할 만큼 붉디 붉은 연산홍과 ‘부처님 오신 날’을 위해 준비한 ‘붉은 등’ 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진 만연산을 가득 채운 신록의 푸르름과 어우러져 따스한 느낌을 전해 준다.
만연사는 귀하디 귀한 손자의 손을 꼭 잡은 할머니의 눈빛과 몸짓이다.
만연사 소개
대한불교 조계종 제 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 만연산은 나한산이라고도 한다. 1208년(고려 희종 4년) 선사 만연이 창건하였다.
유래: 만연은 광주 무등산의 원효사에서 수도를 마치고 조계산 송광사로 돌아오다가 지금의 만연사 나한전이 있는 골짜기에 이르러 잠시 쉬다가 잠이 들었다. 십육나한이 석가모니불을 모실 역사를 하고 있는 꿈을 꾸고 주위를 둘러보니 눈이 내려 온누리를 덮고 있었는데 그가 누었던 자리 주변만은 눈이 녹아 김이 나고 있는 것을 보고 경리롭게 생각하여 토굴을 짓고 수도하가가 만연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그뒤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쳐 보조국사의 사리각을 비롯하여 대웅전 사왕전 나한전과 승당 선당 동산실 서상실 동별실 서별실 수정료 송월료 등의 3전팔방과 대웅전 앞에 규모가 큰 설루, 설루 아래에 사왕문과 삼청각이 있던 대찰이었다.
부속 암자로는 학당암 침계암 동림암 현혈암이 있었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에는ㄴ 만연사 승려들이 군중ㅇ일지에 필요한 종이 및 주식 부식 등을 조달해 외적 방어에 큰 공을 세웠다.
1793년9정조 17년) 화재로 진언집 판각이 타버리는 등의 피해가 있었는나 이듬해 경관이 중건하였다.
한말에는 당시 국창으로 불리던 이동백 이날치 명창이 만연사에서 소리를 닦았으며, 정광수 임방울 등 당대의 명창들고 이곳에서 창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6.25 전댕 때 모든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978년 부터 4년에 걸쳐 주지 철안이 중창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 나한전 , 명부전 , 한신전과 요사체가 있으며 , 절 경내에는 둘레 3m, 높이 27m, 수령 770 여 년의 전나무가 있는데 , 만연사 창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진국국사가 심었다고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