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원 = 정현철 기자 ) 바쁜 일상 속에서 정신없이 살다보면 어느 순간 ‘ 삶의 지혜 ’ 를 찾게 되는 순간이 한번 쯤은 온다 . 복잡한 인간사 속에서 배배 꼬인 문제들을 한 번에 풀어버릴 수는 없을까 . 하지만 , 지혜가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 그럴 때는 조용히 묵상하며 걸음을 걸어 보는 것도 좋다 . 어느 순간 깨달음이 우리를 찾아올지 모른다 .
강원도 오대산 선재길은 쉽고 평탄한 길이다 . 호젓한 숲속 오솔길과 시원한 계곡길이 전부여서 바쁜 일상을 잊고 느긋하게 생각하며 걷기 좋다 .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은 이렇게 조용히 걷기를 원하는 현대인에게 새롭게 떠오르는 명소다 . 오대산을 떠받치고 있는 두 사찰 , 월정사와 상원사 사이를 잇는 ‘ 선재길 ’ 덕분이다 . 1960 년대 두 절을 잇는 도로가 놓이기 전까지 스님들이 왕래하던 길을 2013 년 복원한 것이다 . 오대산은 예부터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산다고 여겨지던 곳이다 . 문수보살의 지혜를 찾아 여행을 떠난 구도자가 불교 경전 ‘ 화엄경 ’ 에 등장하는 ‘ 선재동자 ’ 다 . 길 위에서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선재동자처럼 이 길을 찾은 이들도 나를 돌아보며 삶의 지혜를 찾는 여행을 하게 된다 .
여정의 시작은 월정사에서부터다 . 절의 시작점인 일주문을 막 지나고 나면 쭉 뻗은 잘 생긴 나무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 월정사 초입의 전나무숲이다 . 일주문에서부터 절 입구 금강교까지 1 ㎞ 남짓한 길 양쪽으로 1700 여 그루가 자란다 . 평균 수령 80 여년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정갈함 속에서 월정사를 향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도 깨끗해진다 . 전나무 숲길 끝에 자리 잡은 월정사는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연원 깊은 사찰이다 .
국보 48 호 팔각구층석탑과 월정사 경내의 모습 . 탑 앞에 앉아 진리를 갈구하며 기도하는 보살의 모습이 이채롭다 .
하지만 , 절은 이 역사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 인간의 가장 추악한 악업인 전쟁 때문이다 . 6·25 가 한창이던 1951 년 연합군은 북한군이 이 절을 본거지로 사용할 것을 우려해 경내에 불을 놓았다 . 그렇게 신라 때부터 이어온 월정사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아픈 역사만 남았다 . 현재의 전각들은 그 이후 새롭게 지은 것들이다 . 화마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옛 흔적이 지금도 월정사 앞마당을 지키고 있는 국보 48 호 팔각구층석탑이다 .
팔각 기단 위에 9 층탑을 올린 뒤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석탑으로 , 그 앞에 합장을 하고 기도하는 보살상이 이채롭다 . 문수의 지혜를 깨치기 바라는 우리의 모습이 이 보살상 속에 담겼다 .
월정사를 둘러보고 나면 본격적으로 선재길로 들어서게 된다 . 절 인근에 선재길 입구가 있고 이곳에서부터 8 ㎞ 의 산길이 이어진다 . 선재길은 오대산의 많은 트레킹로 중 가장 걷기 쉬은 길이다 . 오대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오솔길과 계곡길이 전부다 . 대부분 완만한 데다 내리쬐는 햇볕도 없는 숲길이어서 걷는 행위 자체에는 집중할 필요가 없다 . 그러니 이 길에서는 자연스럽게 생각을 하게 된다 . 흐르는 물 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나와 세상을 돌아본다 .
선재동자가 그랬던 것처럼 선재길을 걷는 이들도 ‘ 생각하며 , 또한 걸으며 ’ 문수의 지혜를 찾아간다 . 길 중간중간에 시원한 계곡과 섶다리 , 출렁다리 , 화전민터 등의 볼거리도 만날 수 있다 . 오대산장과 멸종위기식물원이 자리한 동피골도 지나치게 된다 .
길을 걷다가 고단함이 느껴진다면 이런 명소들 주변에 앉아서 언제든 쉬어 가도 좋다 . 머리를 식히며 천천히 세 시간 정도를 걸으면 어느새 끝이 보인다 .
선재길 트레킹의 마지막은 상원사가 장식한다 . 나를 찾는 여행을 끝마친 여행자는 이 절에서 문수보살을 만나게 된다 . 상원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문수보살을 주존으로 모시고 있는 문수신앙의 중심지이다 .
신라 성덕왕이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난 뒤 진여원이라는 절을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이후 조선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 병을 고쳤다 . 세조는 감사의 표시로 진여원의 이름을 상원사로 고치고 왕실사찰인 원찰로 정한 후 문수동자상을 봉안했다 .
아쉽게도 현재 남아있는 상원사 전각들은 대부분 광복 이후 세워진 것들이다 . 다만 , 절에 남아있는 두 점의 국보가 상원사의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 바로 국보 36 호 상원사 동종과 국보 221 호 문수동자상이다 . 상원사 동종은 성덕왕 때인 서기 725 년 만들어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동종이다 . 아름다운 자태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
상원사 본전인 문수전에 남아있는 문수동자상은 세조 때 왕실이 봉안한 목조상으로 양 갈래로 묶은 머리가 이채롭다 . 오랜 역사와 이야기가 담긴 두 문화재를 둘러보며 선재길에서 얻은 나만의 깨달음을 다시 한번 가다듬어 보는 것도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