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우병과 쭉정이

9181
12월에 핀 장미 : 계절을 잊은 것일까? 아니면 인간화 되는 것일까? 인간은 전기로 밤낮의 구분을 없애고 심지어 봄, 여름, 가울, 겨울의 구분도 없앤다.

광우병과 쭉정이

광우병 사태가 있었다. 미국산 수입 쇠고기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숭숭 뚫어지면서 죽어가는 질환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연일 밤마다 촛불 집회가 있었고 정부와 국민 모두 매우 힘들었던 사건이다. 이 일로 개인뿐 아니라 국가 전체적으로도 에너지를 낭비했다는 점에서 손실을 보았다. 시간이 흘러 지금 이 시점에서 보면, 어떤 관점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았던 집단행동이 없지 않아 있었던 것 같다.

대중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다. 또한 역사를 통해 한 사람이 전체를 구하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한 사람이 역사의 물결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도 알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그렇고 세종대왕이 그렇다. 우리가 모르는 사라진, 역사 기록이 되지 않은 많은 중요 사건들이 집단과 개인에 의해 얼마나 좌지우지 되었을까 상상해 본다.

광우병은 양에서 처음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들이 서로의 몸을 긁어대는 질환으로 시작하여 점차 심각해지면서 결국 뇌가 망가져 죽어가는 것이다. 양이 손이 없어 몸이 가려워 긁어댈 수 없기에 다른 양의 몸에 자신의 몸을 비벼대는 것이다. 그래서 스크래피 병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스크래피 질환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감염으로도 발생하지만 뇌에 구멍이 숭숭 생기는 병은 프라이온이라는 변형 단백질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12월에 친 안양천 변의 철쭉: 계절을 잊은 것인지! 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으려 애를 쓰는 것인지! 결국 내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양에 발생하는 스크래피 증상은 일반적 질환일 때도 있었으므로, 그런 양의 고기와 가죽은 보통 때처럼 사용하고 나머지는 소의 사육을 빨리할 목적으로 사료를 만드는 과정에서 섞어 사용한 모양이다. 어쩌면 합리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소를 사육하는 목적이 주로 고기를 얻고자 한 것인데 소는 풀을 먹고 자란다. 그 풀이 소화가 되어 고기가 될 때 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니, 그 시간을 단축하고, 버려왔던 양에서 나온 고기도 사용하고, 일거양득의 효과를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합리적이고 당연하고 논리적으로도 합당하다. 그런데 의도와는 다른 일이 벌어진 것이다. 거기에는 생각하지 못한 요소가 있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정상적이고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그런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분명 예기치 않은 부작용이 발생한 것이다.

양에서 유래한 것을 섞어 만든 사료를 먹은 소가 이상 증상을 보였을 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심각성을 알게 되었을 때, 조사를 해 보니 광우병이 발생한 것이다. 소가 미쳤다 해서 광우병으로 명명된 증상인 것 같다. 일회성 사건이면 아마도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기에 원인을 찾으려 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뇌에 구멍이 뚫린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뇌에 문제가 생기면 당연히 정상적인 움직임이나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사람도 뇌에 문제가 생기면 비정상적으로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광우병 증상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었는지, 그 당시 사람들이 소는 풀을 먹고 자라야하는데 고기를 먹여 키웠으니 신의 뜻을 거역한 벌이라는 말도 했었다. 특히 사람에게서도 광우병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사례가 보고되었고 그 건수가 늘어나면서 역학 조사 결과 광우병에 걸린 소고기를 먹었기 때문에 인간 광우병에 걸렸다고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그냥 동물들이 죽어 나가고 인간에게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사람들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12월초 안양천 뚝 길 : 붉은 단풍 숲길 – 쭉 뻗은 뚝 길을 따라 호젓한 숲길에 초록 사철나무와 붉은 단풍잎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좋다

그런데 이제 소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처럼 뇌에 구멍이 생기면서 죽어갈 수 있구나! 내 가족이, 내 주변의 귀한 사람들이 그리고 나도 그렇게 죽어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서 그 광우병이 발현되도록 한 원인에 대하여 화가 치밀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의 뜻을 거역한 벌’이란 말이 나왔을 것이다. 더욱 공포로 다가온 것은, 소고기를 주식으로 먹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적어도 소고기를 자주 먹게 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내가 먹는 소고기가 광우병 인자를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에 있었다. 그래서 공포라고 하는 전염병이 급속히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의 여건이 그 당시 특히 심했던 것 같고, 언론도 한몫을 한 것 같다.

광우병에 대한 공포가 세계적인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여러 국가들의 규제 상황에서 알 수 있었다. 소에서 유래한 일상 제품이 규제 대상이 되었다. 소에서 유래한 지방은 화장품의 주원료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규제가 강화 되었고 그밖에 소에서 유래한 많은 제품들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 심지어 인간 광우병이 발생한 지역에 방문하는 것과 그 지역을 다녀온 사람들에 대한 제한도 있었다. 연일 인간 광우병에 대한 보도가 거의 모든 대중 매체를 통하여 보도되었다. 이런 보도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여 사람들이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었으나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음식’의 위해성 여부를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이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하여 시간이 가면서 공포심의 증폭으로 이어졌고, 그동안 쌓여왔던 정부에 대한 불신과 내적 불만이 표출되어 집단적 행동으로 나왔던 것 같다.

12월 초 안양천 변의 너무도 샛노랗게 물든 은행잎: 서쪽의 빛을 받아 무심하게 치렁치렁 너무도 샛노랗게 물든 은행잎, 녹색의 머리카락을 계절을 타는지 노랗게 물들였다.

인간의 감정은 인간을 통해 증폭되기도 하고 감쇠되기도 한다. ‘기쁨은 나누면 커지고 슬픔은 나누면 작아진다.’는 말이 그것을 문학적이고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공포라는 감정이 한 인간에게서 작게 시작하여 다수의 인간, 집단을 거치면서 증폭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목숨과 관련된 감정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하여 증폭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야 개인이 홀로 대처하는 것보다는 집단으로 대처하는 것이 더욱 유리하므로 그렇게 되었을 것 같다.

예부터 지혜로운 사람은 감정 조정을 잘 한다고 하였다. 감정은 즉흥적이고 속효성이며 찰나적 성격을 가지는 반면 지혜는 시간이 필요하나 효과는 지속적이다. 언론이 한 일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것이었다. 왜 그랬는지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언론이 편향적이었던 것 같다. 요즘의 언론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기사를 취재하고 만들어 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보다 광우병이 심각한 상황에 있었던 나라에서 우리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 때 우리 언론은 합리적으로 사건을 다루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언론이 그 당시 정치적 행위를 한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 같다.

 

북한산 단풍나무 단풍 : 햇살이 단풍잎을 통해 그림으로 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빛깔로 만들어 진다.

언론 기관도 사람이 운영하므로 그렇게 된 것이 당연했을는지 모른다. 인간은 감정에 휩싸여 즉흥적일 수 있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 하려고 행동하며, 상황에 따라 매우 이기적이어서 남의 희생을 강요하고, 남이 잘되는 꼴을 배 아파하고 하는 등의 인간의 불완전하고 부정적인 면들의 투사였다고 볼 수 도 있다. 소와 자연 입장에서는 그런 일의 빌미를 제공한 인간이 지탄을 받아야하는데 그 분노의 화살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도록 대중 매체가 제대로 일을 했다. 그래서 정작 그런 일의 단초를 만든 것에 대한 것은 기억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이 사건이 시민들의 바른 언론관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을 냉철하게 볼 수 있는 때가 왔었고, 언론은 철저하게 전문성을 가지고 논리와 합리 그리고 지혜로 본연의 역할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뇌리에 각인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다수가 항상 옳을 수 없고 소수가 항상 그를 수도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사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런 언론 문제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인 것 같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의 언론 기관도 예외일 수가 없다. 얄팍한 지식의 옷으로 정신을 치장하고 오만과 편견의 창과 칼로 마음을 무장한 언론인들에 의한 부작용이 역사에 얼마나 많았는가! 언론을 정보를 다루는 인간의 모든 행위로 정의하면 인간 역사에 끔직한 일들이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음을 인류 역사의 단편에서나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2월에 핀 장미 : 계절을 잊은 것일까? 아니면 인간화 되는 것일까? 인간은 전기로 밤낮의 구분을 없애고 심지어 봄, 여름, 가울, 겨울의 구분도 없앤다.

 

선동과 선전, 배반과 배신, 음모와 모략, 거짓 사실의 당당한 주장과 사실의 조작과 왜곡 등이 역사에 점철되어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대량 학살, 세계대전 그리고 지금도 지구촌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는 소수민족의 물리적 정신적 학살과 분쟁 등이 모두 언론과 함께했고 지금도 그렇다. 어쩌면 언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아니 인간이 가진 속성일지도 모른다.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해 본다. 인간의 본성과 자연의 본성은 무엇인가? 인간은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일부로써 전체와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야 오래 갈 것이다. 마냥 매 순간 각 개인이 일거수일투족 자연에 어떻게 조화되면서 살아갈까를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생각의 감옥에 갇혀 사는 것일 것이다. 생각이 많으면 몸이 힘들어지고 올바른 판단을 하기 힘들어 진다. 너무 생각이 많고 마음이 움직이면 병이 된다. 정신 질환자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꾀에 넘어간다.’는 말은 생각이 많아 실패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로, 생각이 많아 심신이 지쳐 병이 되고 그리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됨을 이르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냥 주어진 본성에 충실한 것이 조화롭게 사는 것이다. 주어진 본성에 충실하게 산다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행동으로는 매우 어렵다. 본성이 무엇이고, 충실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주어진 본성에 충실한 것인가!

주어진 본성에 충실한 삶을 살면 몸과 마음이 단단하고 맑아진다. 본성에 충실하지 못하면 갈등이 싹튼다. 갈등이 자라면 몸도 마음도 흐트러지고 산만해진다. ‘갈’과 ‘등’은 모두 넝쿨식물로 이 넝쿨이 나무를 휘어 감고 올라가면 종국에 나무는 자라지 못하고 죽어 고목이 된다. 고목은 갈등이 사는 집이 되는 것이다. 정돈되며 곧고 맑은 상태에서 벗어난 몸과 마음은 본성대로 천수를 다하는 길을 갈 수 없어 일찌감치 고목이 된다. 그럼 무엇이 갈등의 싹을 틔우게 하는가? 아마도 과한 욕심이 아닐까 한다.

땅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에게 물과 흙은 필수이다. 양동이에 흙과 물이 함께 넣고 가만히 두면 흙은 가라앉고 위로 물이 드러난다. 한참 있으면 아래로는 물을 떠받히는 단단한 흙이 있고 그 위로 맑은 물이 드러난다. 물은 흙속을 스며들어가 흙이 필요한 일을 하도록 매개 작용을 한다. 그리고 흙은 물속의 이물질을 잡아들여 분해시키고 물에 필요한 미네랄을 돌려준다. 그런데 이 양동이를 발로 차면 흙과 물은 뒤섞이어 흙탕물이 된다. 흙과 물이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한 번 차인 양동이를 그대로 한참을 두면 다행스럽게 자연의 순리에 따라 다시 흙과 물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러나 흙과 물이 제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양동이를 다시 걷어차면 흙과 물이 서로의 자리로 돌아 갈 수 없게 된다. 흙과 물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도록 양동이에 계속 외부에서 자극을 주면 양동이의 흙과 물은 영원히 제자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갈등의 싹은 바로 욕심이며, 사람의 몸과 마음은 바로 양동이에 들어있는 흙과 물이다. 마음의 본성은 맑음이요 몸의 본성은 곧음, 굳음 혹은 바름이다. 흙탕물은 굳지도 맑지도 않다. 만들어진 흙탕물을 가라앉히면 마음이라는 맑은 물은 투명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몸과 마음의 흙탕물을 가라앉히는 것은 쉽지 않다. 넓은 초원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동물의 사체를 뜯어 먹으려고 주변 하늘을 맴돌며 그 동물이 죽기를 기다리는 독수리처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인간들이 발길을 하려고 양동이 주변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 코, 귀, 입, 몸의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와 태어나서 자라면서 배운 지식에 의한 생각이 그런 ‘발길질’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시대에는 그런 ‘발길질’이 주변사람들에 의한 ‘발길질’보다 더 많은 것 같다. 후천적인 학습과 경험에 의한 지식과 정보가 결합된 생각의 체계를 인간 개개인의 내적 ‘언론기관’으로 생각한다면, 인간은 결국 스스로 만들어낸 내적 ‘언론기관’의 잘못된 선전선동과 거짓과 왜곡에 의해 자신을 흙탕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소에게 단백질을 보충하겠다는 발상이 잘못된 것이었다. 타고난 본성에 맞게 길러야 했고 사람도 그렇게 살아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얄팍한 지식으로 소가 살찌도록 단백질을 먹이는 것을 생각하고 비용을 가능한 줄이기 위해 사람도 먹지 않는 재료로 사료를 만들어서 벌어진 일이다. 지금도 어느 곳에선가 얄팍한 지식으로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여러 감염질환들은 인간이 자신의 얄팍한 지식을 신봉하여 발생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후천성 면역 결핍증(AIDS), 조류 독감, 아프리카 돼지 열병, 구제역, 소나무 재선충, 중동 호흡기 증후군, 유행성 출혈열, 코로나19 등 환경과 인간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들이 모두 인간의 과도한 욕심을 충족하기 위한 활동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 당연히 필수적인 활동은 용인되고 그 것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충족함에도 과도하게 더 많이 가지려고, 과도하게 남보다 더 우위에 있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필연적’ 본성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하여 욕심이라는 요소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혹한의 겨울을 나기 위해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까지 열심히 일하고 준비하고, 그렇게 준비된 것으로 겨울을 나고, 가족의 안녕과 점점 늘어나는 가족 부양의 몫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미리 미리 충분히 준비하고 비축해 두어야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준비와 비축을 위해 효율적인 방법과 방안을 찾으려 생각했을 것이다. 즉, 쉬운 방법과 방안을 고안했을 것이다.

짐승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아도 인간과 다를 바가 없어 미리 준비하고 비축한다. 필요한 것을 비축할 수 없는 경우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준비를 한다. 환경이 열악하면 포자 형태로 숨을 죽이고 잠을 자면서 살아가기 좋은 환경이 조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에서부터 겨울에 최소의 대사만 유지하고 차가운 물속에서 가사상태로 겨울을 나는 물고기들 등 다양한 예들이 있다. 식물도 예외가 아니다. 곰이나 어떤 동물의 경우 미리 몸에 필요한 것을 비축하여 겨울을 나기도 한다. 이런 생물들은 자연과 조화가 되어 얼마나 비축할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필요한 만큼 미리 몸에 비축을 한다. 자연의 규칙적 주기성을 본능적으로 믿고 그에 따라 준비하는 것이다. 자연과 교감을 이루어 삶을 살아왔으므로 자연의 규칙적 주기성에 몸이 맞추어졌는지도 모른다. 그걸 진화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진화일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계절의 양상이 바뀌면 그 생물은 멸절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렇게 지구역사에서 멸절된 생물 종이 많음을 화석을 통하여 알고 있다.

아마도 그런 지구의 역사가 있었기에 인간이 필요 이상의 욕심을 내는 것을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해 본다. 인간을 변호하는 입장의 말이나 생각이 아니고 인간의 몸과 마음에는 지구의 모든 역사가 오롯하게 담겨 있다는 나의 믿음에서 하는 생각이다. 지구의 역사뿐만 아니라 우주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인간의 탐구심에 의한 인간의 우주에 대한 생각은 커다란 폭발, 즉 ‘빅뱅’에서 우주가 탄생하여 팽창하면서 지금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우주를 차지하고 있는 원소가 대부분 수소와 헬륨이었으며, 우주가 커지면서 점차 수소가 모이고, 뭉쳐진 수소에 중력에 의한 압축이 일어나면서 수소의 온도가 핵융합이 일어나기에 충분한 온도가 되어 핵융합이 시작되고, 엄청난 빛을 내면서 우리가 밤하늘에 보는 별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별은 수명이 다하여 빛을 잃어가면서 결국에는 수축하고 중력이 너무도 강력해지면서 내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폭발하는 초신성이 된다. 이 폭발한 초신성의 조각들이 철이나 금처럼 무거운 원소를 만들고 이들이 다시 뭉치고, 주변의 별이 되지 못하고 우주를 방황하고 있던 아직 타지 않고 남은 수소들도 다시 뭉치기 시작한다. 이 초신성의 파편과 수소가 천천히 똘똘 뭉쳐 충분히 무거워지고, 내부 압력이 수소가 핵융합이 일어날 만큼 충분해지면 다시 별이 된다. 우리의 태양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태양은 별이 죽어 썩어서 흩어진 것을 살로 삼고, 우주를 떠도는 수소를 음식으로 하고, 중력을 뼈로 하여 태어난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태양에서 오는 빛을 분석하면 태양에는 수소와 헬륨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양의 금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양의 질량에 비하면 비율이 낮지만 지구의 질량에 비하면 엄청난 양의 금이 태양에 있는 것이다.

수소보다 무거운 원소는 모두 별이 죽어야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몸은 수소를 비롯하여 수소보다 무거운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우주의 태초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다. 단지 인간이 말로 표현할 방법을 모를 뿐만 아니라 표현할 수도 없게 되어 있고, 인간의 역사로 투사할 수 없었을 뿐이지 우리 몸 자체가 곧 우주인 것이다. 거기에다 지구의 역사까지 몸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어쩌면 그런 본질적 속성 때문에 인간 행동의 지구위로의 투영 중 한 형태가 ‘욕심’이며, 인간이 현 시점에서 본 이 ‘욕심’의 ‘부작용’을 인간은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라고 인식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욕심’도 인간의 관점이고, ‘부작용’도 ‘문제’도 인간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광활한 우주의 너무도 사소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에서 인간 세상의 온갖 일들이 아무리 어떠한들 태양계에 미치는 영향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에도, 한강에 돌멩이 하나 던지기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주의 눈에서는 인간이 아무리 어떤 일을 벌여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 세상, 인간 사회에서 인간 개인이 느끼는 문제는 크게 와 닿는다. 살아 있는 동안 고통이 없기를, 살아 있는 동안 행복하기를 바란다. 너무도 당연하다. 원래 인간이, 아니 생명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고통의 본질과 행복의 본질 그리고 느낀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생각을 말하련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동과 그 결과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인간이 겪는 많은 고통과 불행은 어쩌면 필연적일는지 모르나 그럼에도 잘 대처하면 한 개인이나 혹은 더 많은 사람이 고통은 덜 느끼고, 행복은 더 느낄 수 있는 방법과 길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또한 간과하면 안 된다. 그 방법과 길이 좀 더 ‘자연스럽다’고 인간의 관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지극히 인간 편의주의에서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자연과의 조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인간이 우주에서 무슨 일을 벌이든 우주는 모두 포용할 수 있으나, 그것이 그 시점에서 인간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원인이 되거나 고통이면 그것은 인간적 관점에서 ‘자연’, 혹은 ‘조화’가 아닌 것이다.

 

광우병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광우병은 프라이온(prion)이라는 단백질에 의해서 뇌신경 세포가 사멸되면서 일어나는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이 프라이온이 소화기관에서 시작하여 뇌로 올라가 뇌세포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프라이온은 우리 몸에서 필요한 것인데 유독 비정상적인 프라이온이 뇌에 해를 입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정상적인 프라이온과 비정상적인 프라이온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이유로 비정상적 프라이온이 만들어지고 이 비정상적 프라이온이 문제를 일으킨다. 어떠한 기전으로 뇌세포에 영향을 주는지 아직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주로 신경 세포를 파괴하도록 유도하는 것 같다. 세포가 죽음에 이르는 길은 다른 것에 의해 파괴되든가 아니면 자살 기전이 작동하여 죽는 것이다. 다른 것에 의한 것은 바이러스나 세균에 의한 파괴가 있을 수 있고, 염증 반응에 의한 세포 파괴도 있을 수 있다. 자살 기전에 의한 것은 어떤 이유로 더 이상 살아 있는 것이 불가능할 때 세포는 스스로 사멸한다. 연구에 의하면 뇌 세포를 파괴하는 프라이온은 정상 프라이온이 모습을 바꾸어 만들어진다. 즉, 나쁜 프라이온이 정상 프라이온을 변형시켜 나쁜 프라이온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近墨者黑이다. 나쁜 친구가 근처에 있으면 나쁜 놈이 된다. 처음 악성 프라이온이 몸으로 들어오면 몸에 있는 정상 프라이온을 선동하여 악성 프라이온으로 만들고 이들이 더 많은 악성 프라이온을 만들며, 이 악성 프라이온은 뇌세포를 파괴하므로 결국 뇌에 구멍이 뚫리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뇌 기능이 비정상적이 되므로 결국 신체 기능과 정신 기능에 문제가 발생하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치매도 뇌질환이다. 점차 인지기능에 문제가 생기면서 삶이 질이 매우 나쁘게 되는 질환이다. 인간만 치매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동물도 치매에 걸린다. 아직까지 어떻게 왜 치매가 발생하는지 정확한 기전을 모르고 있다.

노령 인구가 늘어나면서 치매 환자도 늘어나는 것을 보면 퇴행성 질환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젊은 사람은 치매가 없는 것도 아니다. 젊은 사람도 치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급속하게 진전되어서 삶이 매우 불행하게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

치매도 뇌에 아밀로이드와 타우라고 하는 단백질이 비정상적이 되면서 일어나는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몸에는 단백질이 꼭 필요하다. 생명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백질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단백질이 화학식은 같지만 구조가 바뀌면서 치명적인 신경 독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특히 뇌 신경세포에 독으로 작용하여 뇌세포를 파괴한다. 어떤 이유에서 정상적인 단백질이, 지켜야할 개체의 뇌세포를 파괴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광우병의 프라이온과 유사한 기전이 작동하는 것 같다. 처음 어떤 이유로 비정상적 단백질이 만들어지면 점차 정상적으로 있어야할 단백질들이 비정상적으로 바뀌어 뇌를 파괴적으로 지배한다. 광우병과 마찬가지로 뇌에서 일어난다.

치매에 대한 연구 중에서 최근 알아낸 것은 소화기관에 이 비정상적 단백질이 존재하면 신경계를 타고 뇌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광우병의 경우와 비슷하다. 서양학문이 최근에 소화기관이 또 다른 뇌라는 것과 근육이 또 다른 심장이라는 것을 밝혀낸바 있다. 여러 연구들에 의하면 소화기관의 문제가 신경계를 타고 뇌로 전이 된다고 한다. 신체의 전체적 이해가 아니면 시도를 하지 못했던 연구인 것이다. 즉, 특정 부위의 특이 질환을 전체적 통섭적 관점에서 사유하고 추론할 수 있었기에 그 것을 실험적으로 보임으로서 전체적 통섭적 관점이 좀 더 문제 해결에 효율적인 길임을 알게 된 것이다.

분석적 환원적 방법으로 큰 성공을 이룬 서양학문의 결과가 이제 한계에 도달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분석적 환원적 방법으로 대처해온 치매를 비롯하여 해결하지 못한 여러 고질적 질환이나 문제가 이제는 전체적 통섭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함을 조금씩 서양에서는 깨닫고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 서양에서는 이미 여러 학문 분야에서 그렇게 하여 중요성과를 얻은 것들도 있다. 반도체나 컴퓨터 그리고 생명과학의 비약적 발전이 그런 례가 된다. 물리학, 수학, 전산학, 화학, 기계공학 등이 결합하여 현재의 반도체공학, 컴퓨터공학, 생명공학이 있게 되었으며,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의학도 그러하고, 우주항공 분야는 더욱 융합적 통섭적 성격이 강하다.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이러한 여러 분야의 성공적 열매를 우리는 성공한 국가에서 가지고 와서 열심히 부지런히 열매를 가공 포장하여 다시 여러 곳으로 수출을 한다. 정작 핵심적 열매를 우리 내부에서 만든 경우가 매우 드물다. 유실수에 열리는 모든 열매가 모두 열매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쓸모가 없는 것도 있다. 어떤 경우는 그 쓸모없는 열매가 과도하게 많이 열리는 경우도 있다. 우리의 학문 환경이 그렇다. 뭔가 많은 열매를 맺은 것 같으나 정작 쓸모가 있는 좋은 열매는 드물다. 대부분 쭉정이이다.

언론도 그렇고, 학문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교육도 그렇고, 외교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그런 쭉정이가 판을 친다. 간혹 좋은 열매가 있는데 쭉정이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언제가 어디선가 어떻게 우리 내부로 들어온 요상한 쭉정이가 우리의 중요 신경계를 타고 우리의 중추신경계를 따라 뇌에 침입하여 ‘쌀’을 모두 쭉정이로 바꾸고 있는 것 같다. 뇌의 에너지가 되는 포도당과 핵심 아미노산의 공급처인 쌀이 이 쭉정이로 인하여 점차 쭉정이로 되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뇌는 점차 기능을 하지 못하는 쪽으로 가는 것 같다. 이런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쭉정이병’이라고 하면 어떨까한다.

치매나 인간 광우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나 방법은 현재까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뇌 구조의 특이성 때문에 약물을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최근 융합적 통섭적 방법으로 비정상적 단백질을 분해하여 실험실에서 치매를 치료한 좋은 결과가 발표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곳곳에, 아니 세계의 곳곳에 퍼져있는 쭉정이를 분해하여 ‘쭉정이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누군가 만들기를 간곡히 바래본다. 그런 명의가 언젠가 이순신 장군처럼, 세종대왕처럼 나타나서 ‘쭉정이병’을 치료하여 혼탁한 흙탕물을 알맞게 단단한 흙과 맑은 생명수가 되도록 할 것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그런 날이 오는 것을 손꼽아 기다린다.

Art & C 최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