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할 때 해.치.자

명절 때나 휴가지 등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놀이 중 하나가 ‘고스톱’이다. 사실 고스톱은 70년 대 초 일본에서 건너온 화투놀이다. 처음 고스톱이 알려졌을 때 게임 룰은 민화투와 별반 차이가 없어 스릴이 없었다. 때문에 고스톱의 인기는 시들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피박’이니 ‘광박’, ‘쓰리고’ 같은 룰이 생겨나면서 지금은 국민놀이가 돼버렸다. 뿐만 아니라 지방마다 고스톱을 치는 룰이 조금씩 다른 것도 고스톱이 갖고 있는 매력이다.
같은 화투놀이도 지방마다 다르듯 술을 마시면서 하는 건배사도 지방마다 다르고 직업이나 직장마다 제각각인 것 역시 술을 마시는 재미를 더 해준다.
회식이나 각종 모임 등을 시작할 때 건배사가 없으면 뭔가 허전하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건배사를 하라면 술잔을 들고 연설을 한다. 이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 건배사는 30초 내지 1분 정도로 짧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건배(乾杯)는 말 그대로 술잔을 비우는 것이다. 주당별곡(酒黨別曲)을 펴낸 남태우 교수(문학박사·중앙대)는 건배의 기원에 대해 “영국의 음주풍습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며 “영어로 건배를 토스트(toast)라고 하는데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에서 토스트를 벌꿀 술잔에 넣어서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 누군가 ‘토스트’하고 도전을 하면 술을 마시는 사람은 그 토스트가 미끄러져 따라 내려오도록 잔을 기울려 술을 마셔야 했다는데서 비롯된 것 같다”고 밝혔다.
건배사는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는 상당 기간 ‘위하여’를 외쳤다. 그래서 한국의 건배사는 ‘위하여’처럼 되어버렸는데 이 ‘위하여’가 식상하자 기발한 건배사가 쏟아져 나와 급기야는 직장 내 회식서 경험했던 건배사를 모아 김선영 씨(한전 충북본부)가 <건배사 모음 대백과>를 펴냈고, 어경선(농협중앙회 차장) 씨는 <행복채움 건배사>를 출간 하는 가 하면 전남선관위는 선거홍보용으로 <기발한 건배사 모음집>도 발간 한바 있다.
술잔을 들고 ‘모내기!’(모처럼만에 내가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 기쁩니다)라고 외치면 십중팔구는 농민일 테고, ‘나가자’(나라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로 건배사를 하면 군인이나 공문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최근 조선일보가 ‘동대문디자인공원 외벽 판 4만5133장의 비밀’이란 기사에서 외벽 판을 감싼 알루미늄 판 제작에 얽힌 일화를 소개 했는데 공사를 맡은 직원들이 국내에선 제작하기 힘들다며 독일로 날아가 공장 견학을 했지만 20년이 걸린다는 이야기에 포기하고 돌아와 한 중소기업체가 알루미늄 판 제작에 성공하여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기사 말미에는 시공사 직원과 공사 현장에 있던 인부들의 건배사 변화를 소개 했는데 ‘된다 된다 풀린다!’(2009년 공사를 맡았을 때 자신감에 차서), ‘될까 될까 풀릴까!’(2010년 독일 공장에서 ‘20년 걸린다’는 말을 들은 직후), ‘돈다 돈다 핑돈다!’(2011년 알루미늄 판을 찍어낼 즈음 격무에 시달려), ‘됐다 됐다 풀렸다!’(지난해 여름 가장 까다로웠던 출입구에 알루미늄 판을 붙이고 난 후)로 변했다는 것을 보고 주당들의 건배사는 이처럼 몸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천상의 소리와 같다고나 할까.
어렸을 적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 가운데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하는 노래를 듣고 “젊었을 때는 일을 해야지 놀자면 어쩌자고…”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나이 들어 생각해 보니 그 또한 맞는 말인 듯싶다. 늙어지면 돈 있고, 시간 많아도 놀 수 있는 힘이 없으니 어찌 놀 수가 있겠는가.
매일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신다는 어느 주당클럽의 건배사는 ‘건강할 때 해·치·자’란다. 건배사를 외치는 사람이 술잔을 높이 들고 ‘건강할 때’ 하면 참석자들은 ‘해·치·자’라고 응답한다고 한다.
얼핏 들으면 살벌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곱씹어 보면 ‘젊어서 노세’ 하는 것과 일맥상통하기도 하는 것 같다. 늙어 병들면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 없는 것이 술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