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남침은 한국 근대사에 대표적인 비극적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아서 70년이 지난 현재까지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등에 업은 김일성의 침략을 막아낸 것은, 당시 절대불리한 상황에서도 이승만이란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해서 당시 이승만박사의 활약중 지금도 알려지지 않은 한 부분을 씁니다.

전쟁통에 국민들이 총탄이나 폭격으로 죽는 것만큼 굶주림과 추위에 죽는 사람이 비등 할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제일 필요한 衣食住가 태부족인 상태였던 것이지요.

소중한 생명의 근원, 밀가루 국수 한그릇, 사진:페이스북

食; 전쟁전에도 미국의 밀가루와 옥수수가루가 들어왔지만 풍족하진 않았는데 6월에 시작한 전쟁으로 수확을 못해서 국민의 먹거리가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됐어요. 옷과 집이 없어도 사람이 죽진 않지만 먹는게 없으면 사람이 죽어요. 이박사의 명령으로 외무장관 임병직은 미국에 긴급 식량지원을 요청합니다. 미국은 즉각 대규모 지원을 실시합니다. 이 부분은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衣; 미국의 우유 밀가루 옥수수가루 대거 공급됨으로 食먹거리는 해결됐으나 衣는 해결하지 못했어요. 집은 움막을 짓고 살수 있지만 헐벗고는 삶의 질이 형편없어져요.
당시 밀가루를 담은 푸대는 요즘과 같이 종이푸대였습니다. 그 종이는 밀가루를 비워내면 용도가 많지 않아요. 고작 도배용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박사는 그 푸대를 잘 직조된 천으로 만들어 달라고 미국에 요청 할 것을 지시합니다. 임병직은 미국측에 그 푸대로 옷감으로 사용 할 요량이니 직조된 푸대에 담아달라고 요청하여 밀가루와 옥수수를 담은 푸대가 옷감으로 써도 될 수준으로 들어옵니다.

당시는 1.4후퇴로 북한의 피난민들이 대거 내려왔는데 그들은 생활 대책이 없었어요. 이박사는 피난민들을 분산하여 각 지방으로 배치하고 그들에게 밀가루 푸대에 검은 물감을 들이는 작업을 시켰습니다. 그 옷감으로 전국민이 옷을 만들어 입은 것이지요. 이북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빠르게 정착한 것은 그 영향이 큽니다.

住; 당시는 거적집을 지어 살거나 판잣집을 지어 살았어요. 바람막이는 그런 것으로 가능했으나 비를 피할 지붕은 안됩니다. 그래서 미군의 식량과 물자 깡통을 펴서 판자집의 지붕으로 썼는데, 이 또한 이박사가 미군물자를 담은 깡통을 펴서 지붕으로 쓸 수있게 질 좋은 깡통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래서 판자집의 지붕은 온통 미국 글씨의 깡통이었던 겁니다. 나중엔 깡통이 남아서 벽으로도 썼습니다.

분유를 담은 용기는 드럼통 같은 큰 종이통였는데, 그것만은 식품이기 때문에 철분이나 옷감으로 바꿀 수 없었답니다. 그래서 파쇄하여 종이를 만들었습니다. 5-60년대 학교의 시험지가 그 종이입니다. 우리 기술자들은 당시 미군부대에서 나온 드럼통으로는 버스도 만들었습니다.

위의 세가지 사례로 당시는 우리의 의식주를 미국의 지원으로 해결했다고 볼 수있고 그 아이디어는 이박사가 생각해낸 것입니다.

임병직은 이박사가 미군을 참전시킨 것에 못지 않게 국민의 衣食住를 해결한 것도 큰 업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이박사가 지시한 그 모든 일을 자신이 일선에서 수행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컸어요. 그 모든 과정을 수행하면서 이박사의 총기와 순발력과 국민사랑이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느꼈답니다.

미국의 우유와 밀가루와 옥수수가루는 60년대 중반까지 들어왔어요. 그래서 지금 60세 이상의 국민은 부잣집자식 빼곤 거의 모두 미국이 보내준 우유와 밀가루를 먹고 굶주림을 해결했을 겁니다. 그래서 요즘 60살 넘은놈들이 반미구호를 외치는 놈들은 개돼지들일 뿐 사람도 아니라고 증오하는 겁니다.

글:손병호/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