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영국과 러시아는 티벳, 투르키스탄등 아시아 내륙을 무대로 세력권 확장 경쟁을 벌인바 있는데 이를 흔히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고 한다.
특히 세계의 지붕이라 불린 히말라야 산맥 너머 해발 3,700미터에 위치한 티벳의 라사에 도달하는 것은 오랫동안 서구인들의 로망이었다.
히말라야 설산(雪山)의 라사는 외부세계에는 난해하고 신비롭게만 비쳐진 티벳 불교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모험가는 물론이고 기독교 를 목표로 한 선교사, 영역확대와 통상이라는 사명을 띤 제국의 스파이 등 숱한 이들의 목표였던 것이다.
영국과 러시아가 판도확장을 위해 티벳을 두고 경쟁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누구보다 먼저 라사에 들어가 1년 이상 머물고 이를 기록으로 남긴 일본 메이지 시대의 승려가 있었다는 사실은 생소하다.
중국의 소수민족 문제와 관련해 위구르 다음으로 관심을 끄는 것이 바로 티벳이다. 세계 위구르 회의와 함께 중국이 그토록 백안시 하는 티벳의 대표부도 일본에 있다. 주일본 티벳대표부에서 행사가 열릴 때마다 일본-티벳간 인연의 끈으로 언급되는 역사인물이 있으니 1901년 라사에 들어간 일본승려 카와구치 에카이(河口 慧海)다.
에카이가 티벳에 들어가기 전 들렀던 네팔의 카트만두에는 일본과 네팔의 우호를 기념하는 카와구치 에카이 방문 기념비가 있고 그가 머물렀던 집은 기념관으로 조성돼 있다. 또 그가 라사에서 티벳 승려 자격으로 불도를 익혔던 세라사원(色拉寺)에도 기념비가 설치돼 있다.
카와구치 에카이는 일본에 전승된 한어(漢語)를 거쳐 일본어로 번역된 불경(佛經)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산스크리트어와 티벳어로 된 불경을 구하고자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티벳에 들어간 인물이다. 카와구치 에카이의 티벳 여행이야기는 서역에 불경을 구하러 가는 당나라 승려의 모험담(唐僧取經)을 스토리로 하는 서유기이상으로 흥미진진하고 실제인물의 논픽션이란 점에서 생동감이 있다. kz.kursiv.media
1866년 오사카부 사카이시에서 태어난 에카이는 어릴 때 사찰 부속교육시설인 테라코야(寺子屋)에 다니고 번의 유학숙(儒學塾)에서 5년 동안 한학을 익힌다. 이후에는 미국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우고 쿄토의 도시샤영학교(同志社英学校)에 입학하지만 가정형편으로 중퇴한다.
그는 선종의 일파인 황벽종(黄檗宗おうばくしゅう)의 절에 출가해 주지가 되지만 불경을 구하기 위해 1897년 코베항을 출발해 싱가포르를 경유, 영국령 인도 캘커타로 간다. 인도에서는 다즐링에서 티벳어학자이며 영국정부의 지령으로 불교학자로 신분을 속이고 라사에 잠입한 경험이 있는 사랏 찬드라 다스(Sarat Chandra Das)와 알게 돼 1년 동안 현지학교에서 정식으로 티벳어를 배우고 하숙집에서 속어까지 익힌다. 하루에 6시간에서 10시간을 어학공부에 매달렸고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여자 어린이와 놀이를 하며 익히는 것이 지름길이라 여겨 하숙집 주인의 어린 딸에게도 언어를 배웠다.
당시 티벳은 오랫동안 쇄국상태였고 밀입국을 했다가 적발되면 본인은 물론 알선자까지 익사형(溺死刑)같은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그는 티벳의 생활상에도 상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대체로 부정적이다. 불결하며 음담패설과 난교(亂交)를 즐겨하며 먹고 자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는 동물 같다고 표현했다. 또 이혼도 많았으며 일처다부(一妻多夫)제도 성행했다고 적었다.
에카이는 어느 경로를 통해 티벳을 들어갈까 고민한 끝에 그는 네팔을 경유하기로 한다. 그리고 일본인 신분을 감추고 중국인 행세를 한다. 1899년 붓다가 도를 깨달았다는 부다가야를 거쳐 카트만두에 도착해 여러 성지를 순례하는 한편 다각도로 티벳 접근을 시도한 끝에 1901년 3월 티벳의 수도 라사에 들어가는데 성공한다. 라사에 이르는 길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빈약한 장비에 신은 헤지고 다리를 다치는 것이 예사였고, 표범과 도둑에도 시달렸다. 설산을 행군하다 갈증을 느껴 웅덩이를 발견해 구더기를 천으로 걷어내고 마셨더니 감로수(甘露水)같았다는 소회도 일기에 남겼다.
라사에서는 티벳에서 두 번째로 큰 세라사원(色拉寺) 승려학교에 입학허가를 받는다. 승려학교에는 티벳인과 함께 몽고인도 있었는데 티벳인은 나태하고 몽고인은 성급하고 참을성이 없다고 에카이는 평가했다. 라사에서 그는 중국인이 아닌 티벳인으로 위장한다. 중국인으로 계속 위장하면 사원의 승방에서 진짜 중국인을 만나 신분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라사에서 에카이는 티벳인도 속이고 중국인도 속이느라 조마조마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라사에서 에카이는 의사로 명성을 떨친다. 위생과 의료 개념이라고는 없었던 당시 티벳에서 주변사람들의 탈구(脱臼)를 치료한 것이 계기가 돼 많은 환자들을 돌보게 된 것이다. 세라 사찰에 머무른 덕에 ‘세라의 의사’란 명칭으로 불리면서 달라이 라마 13세도 만나게 돼 시종의사로 추천을 받지만 자신은 불도를 수행하는 것이 본업이라면서 사양한다. 그는 역대 달라이 라마의 대다수가 30이상을 넘기지 못하고 신하에게 독살됐으며 라사는 신정정치의 특성상 제사장과 귀족들이 결탁한 뇌물의 소굴이었다고 적었다. 또 티벳은 쇄국상태라고는 하지만 교역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어 양모를 영국령 인도와 네팔, 몽고에 팔고 있었고 5백만 인구에 병사는 5천명에 불과한 빈약하기 그지없는 체제라고 기록했다.
달라이 라마 수하의 재무장관 부인을 치료한 인연으로 그의 저택에 입주하기도 하지만 일본인이라는 정체가 드러나면 혹형에 처해진다는 공포를 그는 떨치지 못했다. 1902년 그는 라사탈출을 결심하고 친하게 지내던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그동안 수집한 불경을 말에 싣고 영국령 인도로 향한다. 인도로 가는 길에는 국경검문소 5개가 있었고 라사의 의사로 신분을 위장하고 급히 약을 사러 가는 길이라고 둘러대면서 모두 무사히 통과해 다즐링에 도착한다.
이듬해인 1903년 에카이는 인도를 떠나 코베에 도착한다. 6년만의 귀국이었는데 그는 도착하자마자 티벳에서의 경험을 신문에 기고한다. 그리고 이를 모아 1904년에 티벳여행기(西蔵旅行記チベットりょこうき)를 출판한다. 그의 책은 당시로서는 모두들 처음 듣는 신기한 이야기여서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티벳을 두고 러시아와 각축을 벌이던 영국의 런던에서도 1909년 “티벳에서의 3년”(Three Years in Tibet)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판됐다.
카와구치는 이후 1913년부터 1915년까지 두 번째로 티벳에 들어간다. 이때 네팔에서는 산스크리트어 불경과 불상을 수집하고 티벳에서도 추가로 티벳어 불경과 함께 다양한 민속자료와 식물표본을 수집해 귀국한다. 그리고 다시 입장기(入蔵記)와 설산가여행(雪山歌旅行)이란 기록을 남기는데 이후 제2회 티벳여행기(第二回チベット旅行記)란 제목으로 정리된다.
일본 티벳학의 비조인 에카이는 승적을 반납하고 타이쇼대학의 교수로 취임해 만년에는 티벳-일본어사전편찬에 몰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