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민 칼럼] 관솔 불꽃의 이마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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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민 작가 칼럼니스트 시사평론가

인간은 환경의 동물입니다. 자신의 자란 환경에 절대적인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지요. 그러나 결실을 눈앞에 둔 황금색 바다에서 느끼는 농부의 희열처럼, 사람은 새로운 환경이 다가오면 동화되기는 하지만 익숙한 것에의 기억 때문에 쉽게 다가가지는 못합니다.

탈무드에는 ‘암시는 곧 꿈에서 오는 것이니 언제나 깨어 있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 삶에는 타인의 취향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성품이 초롱한 이슬처럼 맺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마음의 도화지에 행복의 크레파스를 묻히며 살지요.

인도의 구루이자 요기였던 파라마한사 요가난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실현의 정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의 조그마한 정신적인 진동만으로도 전 우주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그럴수록 현실의 두려운 과제로부터 오는 마음의 동요에 더 적은 영향을 받는다.” “생각은 머리로 하는 것이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 대신 행동으로 이웃의 생활과 문화를 사랑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이 정의이지요. 모시적삼처럼 가벼웠던 삶에서 탈피해 세상에 청초한 꽃송이 하나쯤은 피우고 싶다는 희망, 삶에 아로새겨 있는 긍정의 품성은 우리를 말랑말랑한 소주처럼 투명하게 합니다. 만약 내가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을 외부에 알리느라 바쁜 애욕(愛慾)의 노예가 된다면, 가뜩 짧은 삶에서 ‘가장 소중한 내적인 아름다움을 치장할 영혼의 시간’이 얼마나 주어질까요. 삶에서 자아의 배양이 주는 성숙한 희열의 시간은 자연의 선물입니다.

나의 적은 언제나 바로 나입니다. 그런 나를 이겨내면 샘솟는 물이 흘러 강으로 가고, 움튼 새싹은 푸르게 자라 지구별을 환하게 만듭니다. 그 세상의 한 틈에 존재하는 나의 격렬한 춤과 몸짓으로 강과 바다의 경계는 담담히 열릴 것이고, 깨어난 나는 방죽에 앉아 세상에 방기한 교만과 상처를 거둬들일 것입니다.

그렇게 습지에 거둬들인 교만과 상처를 챙기는 동안, 불공평한 빛을 받으면서도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자연의 풍경들은 말이 없지요. 자연은 사막보다 황량하고 화성보다 척박한 공간의 초식생물들에게도, 태양의 영양을 골고루 나눠줍니다. 그래서 세상을 점령한 알렉산드로스보다 디오게네스가 자유롭고 위대한 것입니다.
관솔 불꽃은 살아 온 날보다 살아 갈 날이 훨씬 덜 남은 미명의 희미한 모닥불이지만, 태초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며 아름다운 불꽃을 지펴왔습니다. 그 불꽃이 강물처럼 대해로 흘러갈 수 있다면, 실존하는 우리의 삶이 세상과 교류할 일도 많은 것입니다. 친구들이나 새로 이사 온 이웃들에게 따끈한 시루떡이나 상큼한 과일 하나쯤 들고 가 초인종을 누를 용기가 있다면 상큼한 삶이지요. 삶은 필요 이상의 욕망으로 불꽃을 피우지 않아도 저절로 문화를 만들고 자연과 우주로 나를 이끕니다.

나라는 존재가 도를 깨닫는다고 해서 하늘을 날아가는 매혹적인 새가 될 수 없습니다. 대신 인정과 사랑에 관솔불을 붙이는 송진가루라도 절대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 같은 삶을 살 수 있지요.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성정으로 타오르는 ‘관솔 불꽃의 희망 이마쥬’를 살뜰하게 어루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불꽃언어가 나의 삶입니다.

글:박철민 작가 칼럼니스트 시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