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이 끊기다.(black out)
흔히들 술을 많이 먹고 난 다음 날에는 숙취도 숙취지만 전날의 기억이 나지 않아 답답하기 그지없다. 혹 추태를 부리지는 않았는지 말실수를 하지는 않았는지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그나마 집에 무사히 들어온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왜 술을 많이 마시면 그 전날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까? 술자리 횟수가 늘고 폭음이 반복되면 알콜의존증으로 넘어가는데 초기에는 소위 필름이 자주 끊기는 증상이 나타난다. 술버릇, 명품구매, 도박, 흡연 등 중독성 버릇은 뇌에서 일어나는 기전이 비슷하다. 이들 중독성 습관은 쾌감이나 흥분을 일으키는 신경전달 물질인 도파민(dopamine)의 분비가 늘어나 정상적인 심리상태를 벗어나게 되는 비슷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도파민은 흡연에 의해 유입되는 니코틴 같은 물질 뿐만 아니라 심리상태에 따라서도 분비량이 변화한다. 하지만 술버릇이 다른 버릇 보다 고치기 힘들다. 그 이유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뇌의 변화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알코올의존은 정도가 심할수록 남을 괴롭히기 보다는 술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중증 의존자의 경우에는 2~3일간 밥도 안먹고 술만 마시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은 혼자 걸을 수 있는 체력이 안되면서도 소주 한 병을 사기 위해 먼길을 걸어가는 집착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알코올의존을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간주하고 있다. 알코올의존은 정신분열증ㆍ기억상실ㆍ알코올성 치매 등을 동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나쁜 술버릇이 나타나는 원인은 음주량이 일정량 이상 넘어가면 뇌작용이 부분적 장애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술이 뇌속으로 퍼져나가면서 감정 관련 중추의 일시적 마비가 일어나는데 개개인의 감수성 차이에 따라 다양한 술버릇이 나타난다.
이 같은 술버릇은 처음에 술을 어떻게 배웠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술이든 5잔 이면 폭음
술버릇이 나쁜 사람중에는 취중에 한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사실일 수도 있고, 거짓말 일 수도 있다. 의학적으로는 알코올이 기억저장 기전을 방해한다는 사실이 규명된 바 있다. 순간순간 ‘필름'(기억)이 끊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에 억눌렸던 감정을 술을 통해 해소하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거짓말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아 정말 술 때문에 기억을 못하는지는 당사자만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밖에 나쁜 술버릇을 가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폭음을 한다는 점이다. WHO등에서는 주종을 불문하고 앉은 자리에서 5잔 이상 마시면 폭음이라고 본다. 우리나라 국민의 폭음 습관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한데 이 같은 습관은 왜정과 박정권시대에 산업화를 거치면서 심해졌다고 보는게 정설이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사회 구성원의 스트레스 증가를 수반하고 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가장 저렴한 방법이 음주였기 때문이다. 관대한 음주문화도 한 몫 했음은 몰론이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말이 많아지며, 잘 흥분한다. 술의 중추신경 억제 작용 때문이다. 술에 취하면 기분이나 감정을 억제하는 뇌신경의 통제기능이 차츰 약해진다. 즉 신경의 통제 아래 있던 본능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간혹 술이 뇌 손상을 일으킨다고 하면 의아해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과음, 폭음은 간보다 뇌 신경 손상을 더 광범위하게 초래할 수 있다. 대뇌피질의 옆 부분인 측두엽에는 기억을 입력하고 저장하고 출력하는 ‘해마’라는 부위가 있다. 이 부위에 알코올이 작용하면 정보가 아예 해마에 입력이 안 된다. 기억상실과 다른 건 기억상실이 기억을 불러내는 데 문제가 있는 경우라면, 필름 끊김은 저장도 안 했으면서 문서만 계속 불러내려는 무리한 경우다.
여기서 술을 더 마시게 되면 자율신경을 억제하는 단계로 점점 접어든다. 졸리고, 혈압이나 체온이 떨어진다. 갑자기 많은 술을 마시면 호흡중추의 기능이 저하, 숨을 못 쉴 수도 있다. 폭음으로 급사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이처럼 ‘필름이 끊긴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 적잖다. 이러한 ‘필름끊김 현상’을 반복하면, 뇌신경 손상으로 알코올성 치매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 알코올성 치매는 나이와 상관없이 젊었을 때 과음을 하게 되면 그만큼 뇌손상을 가져와 치매도 빨라지게 된다.
알코올성 치매란?
대학생들의 음주문화 통계를 보면 음주 후 경험으로 가장 많았던 것 중 구토, 숙취를 이어 필름끊김(46%)이 3위로 나타났다. 이처럼 대학생의 음주로 인한 피해는 심각한 수준이나 구체적인 대안을 가진 대처는 미비하여 더욱 큰 심각성을 초래하기도 한다.
문제는 필름끊김이 자주 또는 심하게 되면 자신의 뇌세포가 알코올에 의해 손상을 받아 점점 치매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 후에는 필름이 끊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필름이 없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술을 장기간 과음하면 알코올 치매(Alcoholic dementia)가 생긴다.
노인성 치매는 대개 노년에 증상이 나타나는 것에 비해, 알코올성 치매는 가장 활동적인 30~40대에도 생길 수 있다. 또한 같은 양의 술을 마셨을 경우 남성보다 여성의 뇌신경세포가 20% 정도 많이 죽는 것으로 조사돼 과음하는 여성들에게 특히 알코올성 치매가 경고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음주문화는 이미 심각한 수준을 넘어섰다. 주위에 필름끊김을 경험해 본 사람이 적지 않음을 봐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필름이 끊긴 경험이 있다면 술을 자제하여 마시도록 한다. 필름이 끊기면 그 만큼 뇌에 손상을 준 것이다. 손상된 뇌 세포는 회복이 안되며 뇌손상으로 인해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의 필름끊김은 반복하지 말아야 하겠다.
신재정 / 보건복지가족부 선정 알코올질환 전문 다사랑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