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에서 출발하는 춘천행 열차를 타고 , 북한강을 따라 경강역 , 백양리역 , 강촌역을 지나면 김유정역에 도착한다 . 온 길을 돌아보면 김유정역과 녹슨 기둥에 달린 바람개비가 보인다 . 미당을 키운 팔 할의 바람이 이곳에도 부는 것일까 ? 바람처럼 짧게 살다간 유정의 인생처럼 기차도 떠나 버린다 . 그가 쓴 30 편의 작품 중 12 편이 이곳에서 써졌다 . 유정의 시작점과 마침점이 나란히 찍힌 그 곳으로 떠난다 .
유정의 흔적을 따라가다
김유정역의 옛 이름은 신남역이었다 . 하지만 김유정 대표 소설들의 무대가 된 실레마을을 지키기 위해 2004 년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
역을 뒤로 하고 오른편을 보면 , 문학촌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인다 . 생가와 문학촌은 마을중심에서 벗어난 동쪽 언덕 아래 있다 . 천천히 시골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 , 솟대를 지나 5 분 남짓 걸으면 문학촌 입구가 보인다 . 생가는 ‘ ㅁ ‘ 자형 구조로 된 초가집의 모습을 하고 있다 .
마당에 서서 바라본 파란 하늘은 카메라 컷의 한 장면 같이 아름답다 . 멀리서 보기엔 작아 보였던 집은 가까이에서 보니 , 크기가 크다 . 천석꾼이던 집안은 유정이 어렸을 때만 해도 풍족했다 .
김유정은 1908 년 1 월 11 일 , 이곳 실레마을에서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심씨 사이에서 2 남 6 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 그의 아명은 멱설이었다고 한다 . 멱서리란 짚으로 날을 촘촘하게 걸어서 볏섬 크기로 엮어 만든 그릇을 말하는데 , 그 속에 곡식을 담듯 재산을 많이 모으라는 뜻이다 .
유정이 일곱 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의고 아홉 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 열두 살 되던 해 ,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이 시기가 유정의 삶에서 가장 유복했을 때였다 .
복원된 생가 옆에는 기와집 한 채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김유정기념관이다 . 김유정 관련 자료는 여기에 대부분 전시돼 있다 . 김유정의 손때가 묻은 유품은 현존하는 것이 거의 없다 . 절친하던 소설가 안회남이 김유정의 유품 보따리를 보관하다 월북했기 때문이다 .
지난 2007 년 , 그의 육필원고 사진과 20 대로 추정되는 사진이 발견됐다 . 이런 작은 사진 두 장도 변변한 묘 하나 없는 유정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게는 위안이 됐다 . 기념관 한 편에는 소설 속 상황 재현된 닥종이 인형이 전시 돼 있다 . 봄봄에서 귀를 잡히고 점순이와의 키재기 , 장인 편을 들던 구장의 모습 . 이런 소설 속 ‘ 나 ’ 는 모두 또 다른 유정의 모습이다 .
삶 , 그 자체가 소설이었다
실레마을에는 ‘ 실레이야기길 ’ 이라는 산책로가 있다 .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길로 , 총 16 개의 소설의 모티브가 된 장소가 나온다 . 그의 삶은 느낌표가 많았지만 , 이야기 길은 물음표로 시작된다 . 8 개로 이뤄진 질문은 마을을 돌면 대부분 풀리지만 , 답은 후일 방문했을 때 맞춰보자 .
그의 대표소설하면 ‘ 봄봄 ’ 과 ‘ 동백꽃 ’ 등이 떠오른다 . 이 마을에는 두 소설의 배경이 된 곳이 모두 있다 .
봄봄에 등장하는 점순과 봉필영감의 집터가 정미소 옆으로 자리한다 . 이 봉필영감은 실존인물 이라는 설명에 이어 , 딸을 데리고 데릴사위를 들여 그렇게 부려먹었다고 전한다 . 오죽 동네에서 신임을 잃었으면 별명이 ‘ 욕필 ’ 이었을까 . 점순이도 김유정이 열었던 야학에서 공부하던 제자였다 . 지금도 근방에 사는 연세 드신 어르신이라면 봉필영감 , 김종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단다 .
한편 김유정은 마을에서 야학을 열어 한글을 가르치는 등 계몽운동을 펼쳤다 . 처음 그가 야학을 열었던 토굴이 불타고 그는 같은 곳에 금병의숙을 짓는다 . 그리고 거기서 일 년 반 동안 문맹퇴치 운동을 벌였다 . 금병의숙 옆에는 김유정이 심었다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
그가 고향으로 내려온 것은 당대의 명창 박록주와의 이뤄지지 못 한 사랑 때문이다 . 명창이자 기생인 그녀에게 연하인 유정은 그저 아이였을 뿐이었다 .
산으로 걸음을 돌려 가면 소설 ‘ 동백꽃 ’ 의 배경인 금병산 자락이 나온다 .
어머니의 부름에 기겁하며 산을 내려가는 점순이와 ‘ 나 ’ 의 순수한 사랑 . 알싸한 동백꽃 향기가 날 듯한 길이다 . 소설에서의 동백꽃은 우리가 아는 붉은 동백이 아니다 . 소설 뿐 아니라 ‘ 강원도 아리랑 ‘ 에 나오는 동백도 생강나무를 뜻한다 . 소설에서는 세상에는 없는 노란 동백꽃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 춘천에서는 생강나무를 두고 동백나무라 부른다 . 지금은 몇 그루 남은 않은 생각나무가 있을 뿐이어 아쉬움을 더한다 .
일찍 부모를 여읜 여렸을 때의 슬픔 , 첫사랑 박록주를 포기하고 낙향 , 두 번째 사랑도 이루지 못 하고 병으로 요절한 유정 . 그의 삶은 병마와 이별의 아픔으로 얼룩졌지만 , 들병이 · 촌민과 어울려 살며 능청스레 소설을 써내려갔다 . 먹고 살만한 지금도 글을 쓰는 것이 배고프다지만 , 그 때야 얼마나 고달팠을까 .
창을 열면 짙은 겨울 향기가 풍기는 계절 , 춘천 가는 기차가 서는 간이역 어귀에는 요절한 젊은 소설가의 삶과 애환이 잠들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