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여행하고 있느냐는 셀린느의 질문에 제시는 이렇게 대답한다 . “I got one of those Eurail Passes, is what I did.”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방랑과 같은 여행 . 낯선 이와의 만남 . 그리고 기약 없는 헤어짐 …… .
우리나라 고 3 들이 지겹고도 괴로운 기나긴 수험생활을 감내하는 이유 , 혹은 인내할 수 있는 희망은 대학생활의 낭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하지만 어느덧 취업사관학교로 변해버린 대학에서 그러한 낭만을 꿈꿀 수 없음을 깨닫게 된 많은 낭만주의자들은 배낭여행을 통해 그 꿈을 대신하고자 한다 .
낯선 이와의 만남 , 도전 , 설렘이라는 청춘의 세 가지 아이콘들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 또한 그렇기에 장려되는 것이 배낭여행이기 때문이다 . ( 물론 그러한 낯선 경험들이 실제로도 아름답게 추억되느냐는 하는 문제는 별개다 .)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주연한 1996 년 작 ( 作 ) 비포선라이즈 (Before Sunrise) 는 우리나라 낭만 대학생들의 청춘에 한 획을 그은 영화다 . 실현성이 적고 매우 정서적인 상태인 ‘ 낭만 ’ 을 좇아 청춘남녀들이 배낭매고 유레일패스를 끊게 만든 이 영화는 또한 , 영화와는 다른 현실에 적잖이 실망하고 자기미화가 필요하다는 삶의 철학을 일깨우는 알싸한 영화다 .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는 뻔한 로맨스가 하룻밤이라는 짧은 시간과 ‘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 라는 동화적 식상함을 탈피함으로써 , 오히려 기름기 쪽 뺀 담백함으로 다가온다 . 그런 ‘ 쿨함 ’ 으로 낯선 오스트리아의 비엔나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
예전 우리나라 4 대분 안쪽만 서울이었듯이 비엔나도 링이라 불리는 도로 안쪽이 예전 수도이고 대부분의 유적지들도 이곳에 모여 있다 . 비엔나를 여행하기 위해선 친숙해져야 할 도로명이다 .
고품격 음악축제가 열리는 시청사
오스트리아 링 도로 안에 위치한 시청사는 1883 년에 완성된 신고딕양식의 건물이다 . 베토벤과 모차르트라는 걸출한 음악인을 배출한 도시답게 매년 6 월부터 9 월까지 이곳 시청사 앞에서 비엔나 필름페스티벌이 개최된다 . 뮤지컬과 공연을 비롯해 미술전시회가 어우러지는 비엔나 축제기간에는 해마다 전 세계의 여행객들로 들어찬다 . 특별히 기획된 연극이나 예술 행사들도 많지만 주로 음악에 비중을 두는 편이다 .
아름다운 시청 건물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유명한 오페라 , 발레 그리고 클래식 음악 공연을 필름에 담아 상영한다 . 7 월과 8 월의 저녁 무렵이면 시청사 일대 광장 주변은 축제의 물결로 가득 찬다 .
더불어 미식가들을 위한 미식가를 위한 행사도 마련된다 . 시청 광정으로 들어서는 길에는 여러 나라의 음식들을 파는 상점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있다 . 멕시코 , 호주 , 프랑스 , 이탈리아 등 세계의 먹을거리와 야외 맥주홀에서 마시는 독일 맥주 한잔은 음악의 도시 비엔나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
시청사로 가기 위해서는 U2 호선 라다우스역에서 하차하거나 트램 1, 2, D 번 라다우스플라츠 정거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
셀린느와 제시의 첫 키스가 묻어 있는 놀이공원 , 프라터
시끌벅적함과 화려함보다는 투박함이 묻어나는 비엔나의 프라터는 합스부르크 황가의 사냥터로 사용되던 지역이 1766 년 시민들에게 개방된 곳으로 현재는 비엔나 최대의 놀이공원으로 조성됐다 . 1897 년에 완성된 대회전관람차인 리젠라트는 ‘ 비포선라이즈 ’ 를 비롯한 각종 명화에 출연하며 이제 비엔나의 랜드 마크가 됐다 .
프라터에서 맛볼 수 있는 슈봐인스슈텔체 ( 돼지족발 요리 ) 는 별미다 . 프라터에는 식당만 60 여곳이 있다 . 프라터 대로 끝자락에 자리잡은 루스트하우스는 과거 황실의 사냥용 정자였다 . 이곳에서는 타펠슈피츠와 같은 비엔나 전통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
프라터가 리젠라트를 필두로 무수한 놀이시설로 가득한 아이들의 천국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 리젠라트가 있는 유원지는 프라터라고 하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이다 . 곳곳에 넓은 풀밭과 우거진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쿠겔무겔이라는 ( 엄연한 독립국이다 ) 공화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프라터의 거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
매년 비엔나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하우프트알레는 비엔나의 북부 역에서 시작해 동남쪽으로 뻗어가다 루스트하우스에서 끝난다 .
지하철 U2 선은 비엔나 북부 역을 거쳐 각종 대형 전시회가 열리는 메세 프라터역 , 크리아우역 , 축구장이 있는 슈타디온역을 지난다 . 올해 추가된 도나우 강 건너편 한델스카이역까지 친다면 무려 4 개 지하철역이 존재한다 .
비엔나의 자랑 , 비엔나의 심장
비엔나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슈테판대성당은 오스트리아 수백 년의 역사와 운명을 벽과 기둥에 아로새겨왔다 . 슈테판대성당으로부터 사방으로 뻗어있는 비엔나의 구시가지의 구조에서 알 수 있듯이 슈테판대성당은 비엔나 시내의 가장 중심지역에 위치한다 .
137m 에 달하는 거대한 첨탑이 있는 이 거대한 사원은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양식 건물로 1359 년에 완성됐다 . 지하의 카타콤에는 흑사병으로 죽은 약 2,000 구의 유골과 합스부르크 왕가 유해 가운데 심장 등의 내장이 보관돼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을 모두 주관하기도 한 역사의 현장인 이곳에서 하이든과 슈베르트 역시 소년시절 성가대원으로 음악적 숙성이 이뤄진 곳이기도 하다 .
매년 12 월 31 일에는 비엔나의 시민들이 모여 새해를 맞이하는 모습에서 그들에게 슈테판대성당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짐작할 수 있다 . 평소에도 슈테판대성당이 자리한 슈테판스플라츠 광장은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기도 한데 , 광장에선 언제나 팬터마임을 하는 행위예술가와 거리연주가 등의 모습도 즐길 수 있다 .
슈테판대성당에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 1 번 ,3 번을 타고 슈테판스플라츠역에서 내리면 대성당의 웅장함을 맞이할 수 있다 .
이외에도 비엔나에는 무수한 구경거리들이 가득하다 .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변모한 과거 곡물 시장 노이어 마크트 , 슈테판대성당 옆에 자리한 그라벤거리와 그 옆을 지나쳐 좌측으로 돌면 유명 브랜드들이 모여 있는 비엔나의 쇼핑거리 콜마크트와 조우하게 되고 우측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빈에서 가장 큰 암호프 광장에 들어설 수 있다 .
비포선라이즈에서 제시와 셀린느의 만남이 우연인 것처럼 그들은 우연히도 비엔나에 내려선다 . 서로의 모습에 호감을 느끼지만 더 나은 서로의 기억을 위해 멋지게 헤어지고 만다 . 비엔나에서도 최신의 화려하고 열정적인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지 모른다 . 하지만 모퉁이 건물의 벽에서도 역사가 배어있다 . 젊음의 열정이 아닌 노년의 차분함을 느낄 수 있는 도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