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시티, 담양 창평

(티엔엘뉴스=박예슬기자) 원래는 대나무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메타세콰이어 나무가 장관을 이루는 도로를 지나, 전국 곳곳을 여행하는 주말 예능프로그램에서 익히 소개되었던 푸른 대나무숲 죽녹원을 한 바퀴 돌아나온 후, 다음 코스를 찾아 지도를 펼쳤을 때 눈에 들어온 독특한 문구 하나. 슬로시티 담양 창평.
죽녹원을 나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원시림이자 또 다른 대나무숲 소쇄원을 향해 담양의 남쪽으로 달리다 보면 호남고속도로 대덕분기점과 고서분기점 중간쯤, 그 마을 창평이 있다.

전남 담양군 창평면. 아무런 설명 없이 처음 마주하는 창평의 모습은 민속마을 또는 사극 드라마의 한 장면 같다. 돌을 촘촘히 쌓아 그 틈은 진흙으로 메우고 윗부분을 노란 황토로 세운 담 안에는 기와집들이 군데군데 들어섰고, 황토담 사이로 이리저리 뻗어 나가는 골목의 흙길 위로 소달구지가 느릿느릿 지나는 풍경은 가히 익숙지 않다.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은 듯 우리 옛모습이 재현되고 있는 담양군 창평면 삼지내 마을은 지난 2007년 12월1일 치타슬로국제연맹으로부터 슬로시티로 인정받았다. 슬로시티? 이름을 그대로 풀면 ‘느린도시’이지만, ‘느리게 먹고, 느리게 살자’는 의미의 슬로시티는 우리나라에서도 한참 먼 이탈리아의 작은 시골마을 키안티에서 시작됐다. 물질적 풍요 외에도 사회가 질적으로 발전하고, 좋은 문화가 오래도록 이어지려면 자연과 전통적인 문화를 잘 보호하는 동시에 경제를 성장시켜 따뜻한 사회,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급변하는 속도에 맞추어 생활하는 현대인의 삶에서 ‘느리게, 느리게’를 강조하며 느림의 미학을 알리려는 이 슬로시티 정신은 다소 이질적인 감이 있을지 몰라도, 한 템포 느리게 가는 삶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어느덧 19개 국가, 125개 도시가 슬로시티를 표방하는 정도로 성장했다. 한국에도 전남 신안군 증도면, 완도군 청산면, 장흥군 유치면, 담양군 창평면, 경남 하동군 악양면, 충남 예산군 대흥면까지 6개 지역이 슬로시티로 선정되었는데 창평 삼지내 마을도 그중 한곳이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라 천천히 걸어서도 넉넉잡아 두 시간이면 충분히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을 정도다. 달구지를 끄는 누런 소에게 길 한복판을 내어주고 돌담에 가까이 붙어 뒷짐 지고 걷는다. 완만한 곡선의 골목을 따라 지체 높은 양반 가문 사람들이 몇 대를 내려오며 살았을 듯한 고택을 지나고, 큰 삼베를 펼쳐놓고 시야가 흐린 눈을 연신 크게 뜨며 바느질하는 할머니 역시 지나치며 걷다 보면 이런저런 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한 사람들로 북적인다.

슬로시티에 선정이 되려면 전통과 생태가 잘 보전되고 있는지, 특유의 전통 먹거리가 있는지,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그들의 문화와 지역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한 기준이 되는데, 창평군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췄다. 지역민들과 마을을 찾은 이들이 군데군데 뒤섞여 직접 술을 빚고, 야생화며 산야초로 효소를 만들거나 자연식 밥상을 차리는 일 모두 창평에서 고스란히 이어지는 전통을 직접 체험해보는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예로부터 비옥한 곡창지대였던 담양은 먹을거리가 풍부해 쌀엿, 한과 등 우리나라 전통 주전부리로도 유명하다. 특히 창평 쌀엿은 식감이 바삭바삭하고 입안에 달라붙지 않으며, 먹고 나서도 찌꺼기가 남지 않아 궁중에 진상되었고, 쌀을 물에 담가 일주일 정도 삭힌 후 씻어 건져 말려 사용하는 창평 한과 역시 이 지역의 중요한 특산품이다. 전국을 통틀어 35명에 불과한 ‘식품명인’ 가운데 묵은 간장에 해마다 햇간장을 부어 만드는 ‘진장’ 명인, 창평 쌀엿 명인, 대잎술 명인, 엿강정 명인 등 4명이 모두 담양 출신인 것만 봐도 이 지역의 풍부했던 음식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빠르게 흘러만 가는 도심의 속도전에 지칠 때쯤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 풍부한 슬로시티 특유의 느긋한 시간에 지친 몸 충전하러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