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원=박예슬 기자] 고문헌의 전설이나 신화를 통해서 우리는 술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 만큼 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술을 마시면 술에 취하게 되고 종국에는 인간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술을 마시게 되니 이런 광경은 우리 주변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이다.
술 좋아하기로는 대한국민이 세계에서 손꼽힌다. 민초들의 힘들고 팍팍한 삶을 한 잔의 쓴 소주와 텁텁한 막걸리로 잊을 수 있으니 후에 남이 좀 나무란들 어떠랴. 술 한잔에 영웅호걸이 된 듯 천하를 논할 수도 있으니 대한국민이 술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나? 술을 잘 못 마신다면 그저 술자리 한켠에서 게슴츠레 한 눈으로 지켜 보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은 일이다.
술과 관련한 잡담을 나누며 잠시나마 복잡한 세상을 잊어 보는 건 어떤가? 이야기를 풀어 놓자니 목 마를까 걱정이 된다. 술 한동이 팔러 가야 겠구나…
술꾼과 호랑이
범은 술 취한 사람은 잡아먹지 않고 꼭 술을 깨게 해서 놀라게 하고는 먹는다는 말이 있다 .
옛날 옛적에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해 길에서 잠이 들었다 .
축축한 느낌이 들어 눈을 뜨니 , 호랑이가 잠을 깨라고 꼬리에 물을 축여 얼굴에 뿌리는 것이었다 .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 옆에 있는 담뱃대를 살며시 잡고 있다가 , 술이 캤나 보느라 범이 코를 자기의 얼굴에 대고 냄새를 맡을 때 , 호랑이의 코를 콱 찔렀다 . 놀라 펄쩍 뛴 호랑이는 담뱃대로 코를 찔려 먹을 수가 없게 되자 그만 굶어 죽었다 .
그 후 그 사람은 나무하러 갔다가 죽은 호랑이를 발견하여 가죽을 벗겨 팔아 부자가 되었다한다 .
홍똥
징 치는 영감이 술에 취해 길에서 잠이 들었다 . 한참 자다 깨어 보니 집채만 한 호랑이가 꼬리에 물을 축여 와서 얼굴에 뿌리고 있었다 . 영감이 징을 냅다 치자 크게 놀란 호랑이는 얼굴에다 홍똥을 싸놓고 달아났다 . 뜨거운 홍똥을 뒤집어 쓴 징쟁이는 머리카락이 빠져 대머리가 되었다 . 이로써 대머리가 있게 되었다는 호랑이 담배 먹던 때의 이야기이다 .
호랑이 꽁무니에 나팔을
한 떠꺼머리총각이 헌 나팔 하나를 사서 심심하면 불고 다녔다 . 어느 날 산 너머에 갔다가 술에 취해 고개에서 잠이 들었다 . 그런데 이상하여 눈을 떠 보니 호랑이가 꼬리에 물을 축여 얼굴에 뿌리고 있었다 . 정신이 든 그는 또 다시 호랑이가 물을 뿌리려고 할 때 꽁무니에 나팔을 힘껏 끼웠다 . 그러자 호랑이가 펄쩍펄쩍 뛸 때마다 , ‘ 빵빵 ’ 하고 소리가 나자 , 더 놀란 호랑이는 마구 뛰어 달아났다 .
주천석 ( 酒泉石 )
양예수라는 훌륭한 의원이 사신과 함께 중국으로 가는 길에 노숙하다가 호랑이에게 업혀가 , 호랑이 새끼의 다리가 부러져 있는 것을 고쳐주게 되었다 . 호랑이가 고마움의 표시로 조그마한 돌 하나를 주었다 . 양예수는 다시 호랑이 등에 업혀와 여행을 계속하였다 . 한 읍내를 지나면서 그 돌이 궁금해 무엇인가 알아보았다 .
놀랍게도 그 것은 물에 담그면 물이 향기 좋은 술로 변하는 주천석 ( 主 泉石 ) 이라는 고귀한 돌이었다 . 그 돌을 담가 만든 술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백문선
이조 중엽에 백문선이란 호방한 사람이 있었다 . 집안이 조석반을 제대로 못 끓일 만큼 가난했으나 , 백문선은 돈 벌 생각은 안하고 건달들과 어울려서 술추렴만 하고 돌아다녔다 .
백문선에게는 무남독녀가 하나 있었는데 , 어느덧 나이가 차서 시집을 보내게 되었다 . 워낙 가난한데다가 술망나니 집안이라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으나 다행이도 인물이 뛰어나게 고왔으므로 부자 집에서 데려가겠다고 나섰다 .
혼인 전날까지 술만 퍼먹고 나돌아 다니다가 그래도 잊지 않고 집에 돌아온 백문선에게 아내는 , “ 내일 후행에 달리 갈 사람이 없으니 당신이 가시오 ” 하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 생각해 보니 백문선도 과연 그럴 수밖에 없긴 하지만 한 가지 문제는 입고 갈 옷이었다 .
“ 가기는 내가 가야 될 모양인데 입고 갈 옷이 만만치 않구료 , 누덕누덕 기운 저고리는 두루마기 속에 입으니 보이지 않으니까 무관하지만 , 요렇게 때가 쪼르르 흐르는 바짓가랑이가 두루마기 아래로 내다보이는 건 어쩌겠소 ?”
아내의 입에서는 한숨만 나왔다 .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아내는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고개를 번쩍 들었다 . “ 이제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
“ 어떻게 ?” “ 내고쟁이를 입으시고 대님만 매면 불편하기는 하지만 괜찮을 게 아니요 .” 그래서 백문선은 아내의 고쟁이를 입고 대님을 맸다 . 그리고서 딸의 가마를 따라 나섰는데 팽팽히 잡아당기는 고쟁이가 뜯어질세라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사돈의 집에 이르렀다 .
대례가 끝나고 폐백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잘 차린 술상이 나왔다 .
사돈이 술을 권하는 바람에 백문선은 아내가 신신당부한 말을 잊고 마냥 받아 마셨다 . 그리고는 취할 대로 취하여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 누가 이부자리를 깔아 주었는지 아내의 속옷을 보고 새 사돈이 웃었는지 어쨌는지도 모른다 .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백문선은 잠결에 거추장스럽 고쟁이를 벗어 내던졌다 . 아랫도리가 알몸뚱이가 되었으니 시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좀 시원해지니까 잠이 다시 깊이 들었다 .
얼마쯤 지나 어렴풋이 잠이 깨자 백문선은 심한 갈증을 느꼈다 . 그는 더듬더듬 방문을 찾아 열고 엉금엉금 기어 부엌으로 나갔다 . 아랫도리가 선뜩했지만 술이 안 깬 백문선은 자신이 바지를 벗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 물독을 더듬어 물을 마시고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잘못하여 안사돈이 자는 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
그 방에는 잔치에 참석했던 일가친척과 동네 아낙네들이 자고 있었다 . 백문선은 엎어지듯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눕자마자 천정이 들썩거릴 정도로 코를 골았다 .
이튿날 한 여인이 일어나 아랫목을 보고는 , “ 에그 , 망측해라 . 저게 누구야 ” 하고 소리를 쳤다 .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백문선은 잠결에 남이 덮고 있는 홑이불을 끌어다가 상반신을 얼굴까지 덮고는 , 벌거벗은 궁둥이를 내놓은 채 엎드려 자고 있었던 것이다 .
그 여인의 비명에 다른 여자들도 일어났다 . “ 뭘 그러우 .” “ 저걸 봐요 . 누가 저러고 자우 글쎄 .” 사람들이 아랫목을 바라보았다 . “ 저런 , 망측스러워라 .” “ 누구야 ?” 아낙네들을 킥킥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 “ 아 , 오쟁 할머니가 아냐 .” “ 글쎄 .” “ 초저녁에 있던 오쟁 할머닌가 보우 .” 한 마디씩 주고받는데 백문선이 이불 속에서 잠이 깼다 . ‘ 아뿔싸 !’ 백문선은 자기가 딸의 후행으로 새사돈 집에 와서 술에 잔뜩 취했던 것을 깨달았다 .
그렇다면 자기가 어떻게 해서 안사돈 방에 와 누웠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 “ 잠결에 더워서 그런 게지 . 깨면 부끄러워할 테니 가만히 이불로 덮어드리고 우리는 살며시 나갑시다 .” 안사돈의 도량 있는 말에 아낙네들은 백문선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
깨물어 먹어
어느 주막에서 손님이 술을 마시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거지가 달려들어 “ 배가 고파 죽겠습니다 . 나리 ” 하고 졸라댔다 . 그래도 손님이 모른 체하고 술만 마시자 , 여전히 거지는 물러가지 않고 사정했다 . “ 배가 고파서요 , 나리 .” “ 그러니 날더러 어쩌란 말이야 .” “ 막걸리 한 잔만 베풀어 주시면 전 사발까지 깨물어 먹겠습니다 .
원체 배가 텅 비어서요 .”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손님이 술 한 잔을 따라 주자 , 거지는 그대로 쭉 들이키고는 술 사발을 다시 상에 놓았다 . “ 이봐 , 약속이 틀리잖아 , 왜 술 사발을 깨물어 먹지 않는 거야 ” 하고 손님이 말하니까 거지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 “ 이젠 배가 고프지 않으니까요 .”
중의 마누라라와 소실
옛날에 매우 덕이 높아서 신도들에게 존경을 받는 중 한 사람이 있었다 . 그는 늘 , 자기는 석가여래의 가르치심을 충실히 지키기 때문에 이제는 생불이 되어 술 ,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은 물론 여자도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자랑하였다 . 이 중이 어느 날 볼 일이 있어 저자거리에 나갔다가 우연히 한 신도와 만났다 .
신도는 중의 가사 소매 속에 병꼭지가 비죽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 “ 스님 , 그게 무슨 병입니까 ?” 하고 물었다 .
“ 아 , 이것 말입니까 ?”
“ 호호 , 스님도 약주를 하십니까 ?” “ 아 그런 게 아니고 고기가 좀 있기에 그걸 먹을까 해서 술을 조금 받아가는 것이지요 .”
“ 고기도 잡수시는군요 ” “ 아 아니요 , 어제 장인이 오셨기에 좀 대접하려는 거요 ” “ 스님께선 장인도 계십니까 ? 한 번도 뵈온 일이 없는 걸요 .”
“ 그럴 거외다 . 다른 때는 오지지 않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 하지만 오늘만은 경우가 다르지요 . 마누라와 소실이 대판 싸움을 해서 그걸 말리러 와 계시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