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공업계는 법적대응 등 강력조치 방향선회
– 한 푼이 아쉬운 여행사 … 직원 인내만 요구
국내 항공사 승무원 A 씨는 고객을 대할 때면 자신의 감정은 뒷전이다 . 무리한 요구에도 싫은 내색을 하기는 쉽지가 않다 . A 씨는 “ 기내에서 볼 신문을 찾던 한 손님이 대한민국의 넘버원 신문이 없다며 난리를 피우는 경우도 있었다 ” 면서 “ 기내식 서비스를 시작할 때 자신을 깨웠다고 버럭 화를 내는 일도 다반사 ” 라고 했다 .
모 여행사 신입직원 B 씨는 성수기 시즌 수 없이 시달린 일명 진상 고객들로 퇴사를 고민 중이다 . 어이없는 일로 시비를 거는 손님은 양반이다 . 얼마 전에는 분명 환불이 불가한 항공권이라고 명시했음에도 불구 , 취소 후 환불을 안해주냐며 난리를 피워와 남모를 속앓이를 했다 . B 씨는 “ 고객 만족주의에 내 감정을 숨겨야 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다 ” 고 말했다 .
고객의 감동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 언제나 상냥한 웃음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 , 그들을 우리는 ‘ 감정 노동자 ’ 라 부른다 .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고객과 직접 대면하는 항공기 승무원 , 판매원 , 전화 상담원 등이 대표적 감정 노동자로 꼽힌다 . 감정 노동이란 실제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무관하게 직무 수행에 적합한 감정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업무 형태를 의미한다 .
따라서 감정 노동자들은 자신의 감정이 배치되는 상황에서조차 고객 만족을 위해 감정을 통제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 적절한 개입 없이 이러한 업무 스트레스에 지속적으로 노출 될수록 감정 노동자들의 심리상태는 ‘ 정서마비 ’ 에 이르게 되고 , 더 나아가 고객들로부터의 지속적인 폭언 , 욕설 등은 심각한 심리적 외상을 불러 일으켜 장기적으로는 정신건강에 위험을 가져 올 수 있다 . 본지가 바라본 여행업계는 위험했다 .
천태만상 진상고객 … ‘ 너무 힘들다 ’
한 포털 사이트의 여행 커뮤니티 , 일명 ‘ 애프터서비스 성공비결 ’ 에 관한 얘기가 영웅담처럼 올라와있다 . 어떻게 하면 항공좌석을 조금 더 편한 곳으로 배정 받을지 , 이코노미에서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지 , 기내 물품을 하나라도 더 챙겨올 수 있는지 , 단돈 만원이라도 여행사 할인 받는 방법 등이 버젓이 노하우로 올라와 있었다 . 이처럼 진상손님의 ‘ 갑질 ’ 은 천태만상이다 .
인천공항에서 일하고 있는 대한항공 관계자에 따르면 면세점 쇼핑을 즐기다 탑승 5 분전에 도착해 막무가내로 게이트를 열어달라는 경우 , 수화물 규정을 무시하고도 무작정 떼를 써 추가비용을 내지 않으려는 경우 , 심지어는 다른 항공사 티켓을 가지고와 대한항공인줄 알고 발권했다며 탑승시켜 달라는 경우도 있다 .
여행사에서 근무했던 S 씨의 사례는 더 하다 . 여행사에서 가입시켜주는 여행자보험을 한 손님이 마다했다 . 자신이 따로 가입할 테니 필요 없다고 했다 . S 씨는 절대 가입하지 말라는 손님의 말을 믿고 손님을 출발시켰다 . 한 달 여가 지났을까 , 여행을 다녀온 손님의 가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 자신이 생각했던 여행과 너무나 달라 스트레스를 받았고 , 현지에서 고혈압으로 병원을 다녀왔으니 병원비 외 일체를 책임지라는 전화였다 . 가입하신 여행자 보험을 통해 병원비 등은 보상받을 수 있다고 전했으나 , 돌아온 대답이 더욱 가관이었다 . 여행사에서 손님을 보내는데 어떻게 여행자 보험을 가입하지 않느냐며 노발대발 한 것이다 . 결국 회사에서도 S 씨에게 책임을 묻고 일부분은 S 씨의 돈으로 손님의 병원비 등을 보상하라 지시했다 . 진상 손님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것은 항공권 및 상품 예약 , 상담 등을 하는 고객센터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 H 여행사 콜센터 K 씨는 얼마 전 재취업했다 . 폭언과 성적인 농담을 일삼는 악성 민원인들 때문이다 .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콜센터 종사자들이 응답한 폭력경험은 ▲ 고객의 무리한 요구 (68%) ▲ 인격을 무시하는 발언 (72%) ▲ 욕설 (65%) ▲ 성희롱 (32%) 등이다 . 그리고 이러한 일을 일주일에 평균 1.4 회 꼴로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 이런 상황에도 대다수 직원들은 언어적 폭력에 대한 대응 스크립트나 매뉴얼이 없어 고객의 언어적 폭력에 적절하게 맞서지 못하고 있었으며 , 부정적 상황에도 규칙상 오히려 먼저 사과를 하거나 , 고객의 전화를 끊지 말라고 교육을 받거나 , 전화를 먼저 끊으면 평가에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
한 업계 관계자는 “ 진상손님을 응대하고 보상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다른 서비스 비용을 높이게 된다 ” 며 “ 이로 인해 선의의 고객들에게 오히려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가게 된다 ” 고 지적했다 .
항공사는 ‘ 강력대응 ’ 여행사는 ‘ 받아줘 ’
항공업계는 이러한 블랙 컨슈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 중이다 . 대한항공 측은 얼마 전 기내 안전을 위협했다는 이유로 한 승객을 항공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 항공사가 승객을 상대로 직접 고소한 첫 사례다 . 대한항공 관계자는 “ 기존에는 승무원이 폭행을 당했을 때 승무원을 대신해 고발하는 수준이었다 ” 며 “ 올해부터는 승무원 폭행 승객 중 정도가 심각하다 판단되면 회사 차원에서 고소장을 제출한다 ” 고 말했다 .
아시아나항공의 경우는 ‘ 패널티 프리 ’ 제도를 운영 중이다 .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 최대한 고객을 끝까지 응대하겠지만 욕설 , 성적인 농담 등을 하는 경우에는 직원이 먼저 전화를 끊고 응대를 종료하게끔 한다 ” 고 밝혔다 . 한 저비용항공사는 블랙리스트를 마련해 리스트에 오른 고객의 항공권 예약을 막거나 , 재 탑승할 경우 공항관계자 , 승무원들과 공유해 기내에서 난동이 발생하지 않도록 중점적으로 관리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 이렇듯 최근 항공사들은 블랙 컨슈머에 대한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 항공사들은 기내 폭력 , 협박 등 안전을 저해하는 행위에 대해 즉각적인 제재 조치를 취하거나 소송 , 경찰 신고 등 추후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공통된 절차를 마련할 예정이다 . 대한항공 관계자는 “ 항공기 운항안전을 저해하는 기내 질서 위반 행위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앞으로도 강력한 대처를 통해 , 선의의 승객 및 임직원 모두를 보호 할 것 ” 이라고 강조했다 .
그러나 항공사보다 고객노출에 더욱 취약한 여행사들은 아직까지 별다른 방안을 마련하지는 못한 모습이다 . 블랙 컨슈머라도 끝까지 고객응대 할 것을 회사 측에서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한 여행사 고객 상담 직원은 “ 고객이 욕설 등을 할 경우 현재 녹취되고 있다고 알리는 정도가 할 수 있는 대응 ” 이라며 “ 수치를 느낄 정도로 극에 달했을 때에도 회사 매뉴얼 상 전화를 먼저 끊을 수는 없다 ” 고 했다 .
또 다른 여행사 관계자는 “ 할인 , 서비스 요구 등을 진절머리 나도록 요구하는 경우는 예사 ” 라며 “ 못 이기는 척 해줘야 그나마 진상고객이라도 다른 여행사에 뺏기지 않는다 ” 라고 말했다 . 지나친 경쟁과 여행사의 미약한 대응 등이 블랙 컨슈머를 키웠다는 의견도 있다 . L 여행사 CS 팀 팀장은 “ 여행사들이 함께 이 같은 고객에 대한 공통 대응방안을 마련해야하는 것 아니냐 ” 며 “ 진상 손님도 아쉬워 받아주는 여행사들이 다수이니 갈수록 진상고객이 늘고 있는 것 같다 ” 고 했다 . 한 업계 관계자는 “ 여행사들이 알게 모르게 일명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놓는다 ” 라며 “ 그러나 이것이 일종의 고객성향관리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입장이고 , 만약에라도 밖으로 세어나갔을 경우의 여파와 안티고객 생성 등의 이유로 블랙 컨슈머에 대한 대응이 어렵다 ” 고 밝혔다 .
여행사 차원 직원 보호 장치 마련해야
가까운 일본의 경우는 노동안전위생법에 따라 사업자는 사업장에서 ‘ 노동자 마음 건강 유지증진을 위한 지침서 ’ 를 정하도록 하고 있으며 , 이 기준에 따라 발병의 원인이 된 작업을 했다고 인정되면 산재로 인정한다 . 또한 이 때문에 노동자가 자살이나 자해 등을 일으키면 사용자에 대해 사용자 책임과 안전 배려 의무 등을 위반한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유럽의 경우에는 직무 스트레스를 제조업과 서비스업에 광범위하게 적용해서 산업재해의 범위를 사고 중심에서 질병 중심으로 확대하고 있고 , 2000 년부터 직장에서 받는 직무 스트레스를 차별행위라고 간주하여 이를 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되었다고 한다 .
우리나라도 최근 감정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인식이 퍼져나가며 관련 내용을 담은 산업안전보건법 등이 국회에 발의된 상황이다 . 다른 업계에서는 감정노동자들의 감정치유나 스트레스해소를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는 추세다 . 한 기업에서는 사내 교육이 있을 때 마다 전문가를 초청해 직원들의 심리상담과 치유프로그램을 진행한다 . 이 프로그램이 도입된 것은 친절교육도 중요하지만 직원들을 돌보고 보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인식에 기 반한 것이다 . 국내 많은 기업들도 인식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 여행업계 한 관계자는 “ 임직원을 위한 프로그램 , 제도 마련 등을 통한 보호가 시급할 때 ” 라며 “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지 않으면 누구도 지켜줄 수 없다 ” 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