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섬 , 엘니도 ‘ 라겐 아일랜드 ’ 에서 보낸 이틀
‘ 필리핀도 이렇게 큰 나라였구나 ’
동이 틀 무렵부터 온종일 자동차를 타던 날이었다 . 남북으로 길쭉하게 생긴 팔라완섬의 허리부분에 해당하는 푸에르토 프린세사에서 출발해 최북단의 엘니도까지 가는 길 , 새삼 필리핀도 큰 나라임이 실감됐다 . 사실 필리핀에서 이렇게 오랜시간 자동차를 탄 적은 없었다 . 기껏해야 공항과 호텔을 오가는 길이었을 뿐 , 도시와 도시를 잇는 . 더군다나 산악 도로를 몇 시간씩 지나는 일은 결코 드물었다 . 왜 그런가 반문해보니 금쪽같은 시간을 이동에 허비할 수는 없어서였다 . 차라리 그 시간에 찬란한 바다빛에 한 번 더 취하는게 더 효율적이겠다는 것이 내 나름의 계산이랄까 . 지금껏 지켜온 치밀한 (?) 계산을 이번 여행에 와서야 져 버리게 된 것은 ‘ 엘니도에 가면 지금까지 봐 왔던 것 보다 훨씬 아름다운 바다를 볼 수 있다 ’ 는 말 때문이었다 .
이렇게 멋진 바다가 기다리고 있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내리막과 오르막길 . 동서남북 분간이 안 될 정도의 많고 많았던 커브길을 돌고 돌아 다섯시간만에 엘니도에 도착했다 . 마을 너머로 푸른빛 바다가 넘실댔지만 그리 대단한 볼거리는 못됐다 . ‘ 필리핀 어딜간들 , 이런 바다쯤은 없을까 ’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는 갑자기 몰려든 피로감에 사리판별이 안섰다 . 얼른 쉬고싶은 마음 뿐이었다 .
이런 오만한 착각이 싹 다 달아난 것은 ‘ 리겐아일랜드 행 페리 ’ 를 타면서였다 . 높은 파도 뒤로 병풍처럼 펼쳐진 다도 ( 多島 ). 이름모를 섬들은 그 나름의 형체와 모양을 갖고 있었다 . 어떤 것은 높다란 해안절벽이 에워싼 요새같았고 , 또 어떤 섬은 이상야릇한 외계생명체를 닮았다 . “ 이 섬들 대부분이 무인도에요 ” 페리 선장의 한마디가 귓가를 스친다 .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몇 해전 , 인기 티비 프로그램 ‘ 무한도전 ’ 의 무인도 특집 역시 이곳 , 엘니도에서 촬영됐단다 . 그간 여행지로서는 ‘ 미개척지 ’ 중 하나에 불과하던 이곳이 방송이후 조금은 더 알려져 이곳을 찾는 한국인 여행자들도 많아졌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
사 실 이곳에는 필리핀이 자랑하는 모든 풍경이 숨어 있다 . 2 억 5 천만년에 걸쳐 형성된 석회암 절벽들이 호위하고 있는 조용한 해변 , 바다 한 가운데 . 수심이 성인 허리 높이밖에 되지않는 ‘ 라군 ’ 들도 엘니도가 자랑하는 풍경이다 . 바닷속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 전세계에서 해양 생태계가 가장 잘 보존된 지역중 하나다 . 특히 바다거북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유명해 다이버들의 로망이 되곤했다 . 이렇게 멋진 풍경이 있음에도 ‘ 미지의 여행지 ’ 로 머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 불편함 ’ 때문이었다 . 험준한 산맥과 거친 바다에 둘러싸여있어 푸에르토 프린세사에서 자동차를 타고 대여섯시간을 힘겹게 달려오거나 세부나 마닐라에서 경비행기를 타는 수 밖엔 방법이 없었다.
그 어느 수단이든 비용적인 측면이나 시간적인 지출이 만만치 않아 원하든 , 원치않든 청정 자연 그대로를 간직할 수 밖에 없었다 .
외딴 섬에서의 이틀밤
‘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섬들을 지나쳐 왔을까 ?’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바닷바람에 안면이 마비될 무렵 , 드디어 페리가 속력을 낮추기 시작했다 . 정확하지는 않지만 선착장에서 출발한지 40 분쯤 지난 시점 . 어느덧 페리의 선두가 향하는 방향은 어느 외딴 섬으로 정해진 모양이다 . 두개의 높게 솟은 봉우리 사이로 단층 건물 몇 채가 나란히 서 있는 , 지금까지 거쳐온 숱한 섬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의 섬 이었다 .
이 섬의 정식명칭은 ‘ 라겐 아일랜드 ’. 가까이로 다가가자 섬의 전체적인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 멀리서 본 것 보다 훨씬 높은 봉우리가 떡하니 버티고 있고 , 그 아래 좁은 여유공간을 겨우 비집고 리조트가 자리했다 . 작은 모터보트만 오갈 수 있는 항구와 전용해변 . 듬성듬성 심어진 야자수 나무아래 바다와 맞닿은 곳엔 넓은 야외 수영장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 영화속에서나 보던 ‘ 파라다이스 ’ 가 이런곳인걸까 . “ 정말 여기서 이틀을 보낸다고요 ?” 환호성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 이 멋진 바다 한가운데 , 비밀스런 섬에서의 이틀밤이라니 ! 거짓말 좀 보태 한국에서 내집을 산다더라도 이렇게 좋을수는 없겠다 싶다 .
온갖 감탄사들을 ‘ 질질 흘려가며 ’ 리조트 리셉션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듯 흥겨운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 그 선율에 맞춰 공연이 시작됐다 . 우리 일행의 입도를 축하하는 일종의 ‘ 환영식 ’ 이었다 . 조용하던 섬에 모처럼의 소음이 퍼지자 주변에 있던 숙박객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 ‘ 오늘은 또 누가 이 섬을 찾아왔나 ’ 하는 호기심어린 표정과 함께 . 현실감각이 돌아온 것은 옅은 미소로 일관하던 직원이 수줍게 건넨 월컴드링크 한 잔을 다 들이키고 나서였다 . ‘ 아 , 이게 꿈은 아니었지 ’ 하고 .
<2 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