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아서 가발을 만들 거야 .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은 좋다고 할 수 없지만 , 내가 방금 머리카락을 뽑은 이 계집은 토막 낸 뱀을 마른 생선이라고 팔았어 . 염병에 걸려 죽지 않았다면 지금도 팔고 다니겠지 . 나는 이 여자가 한 일을 나쁘다고 생각지 않아 .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굶어 죽었을 테니까 . 그러니 내가 한 일도 나쁘지 않아 . 이 노릇도 안 하면 굶어 죽게 생겼거든 . 이 여자도 아마 내가 하는 짓을 너그럽게 보아줄 거야 ."(…) 노파의 말을 듣고 있던 사내의 마음에는 차차 어떤 용기가 솟았다 .(…) “ 정말 그래 ? 그럼 내가 네 껍질을 벗겨가도 날 원망하지 않겠지 ? 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판이란 말이야 ."(…) 사내는 재빨리 노파의 옷을 벗겼다 . 그리고는 다리에 매달리는 노파를 거칠게 시체 위로 걷어차 버렸다 . –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 라쇼몽 ] 중에서 .
신인에게만 수여하는 일본의 유명한 문학상 , 아쿠다가와 상이란 이름의 그 주인공 ,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작품 [ 라쇼몽 , 羅生門 나생문 ] 일부다 . 이 단편소설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인간의 참혹한 먹이사슬의 현장을 아주 짧고 강렬하게 보여준다 . 뱀을 생선이라 속여 판 여자 . 죽은 그 여자의 머리카락을 뽑아 가발을 만들어 입에 풀칠하는 노파 . 그 노파의 옷을 홀랑 벗겨 달아난 사내 . 이 중 누가 가장 나쁜 인간일까 . 혹시 나라면 , 당신이라면 ,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 삶이란 이름으로 , 생존이란 이름으로 , 우리는 그 모두를 이해하고 용서해도 되는 것일까 .
아쿠다가와 류노스케가 이 짧은 처녀작에서 드러내려했던 주제는 ,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 의해 전혀 다른 버전으로 각색된다 . 영화 [ 라쇼몽 ] 에서는 남편 앞에서 그의 아내를 강간한 도적 , 남편 앞에서 도적에게 강간당한 아내 , 도적에게 아내를 지키지 못한 남편 , 그리고 그들을 지켜본 또 한 명의 목격자 , 이렇게 네 사람의 시선을 통해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기 정당성을 지키려는 인간의 다중적인 특성을 소설보다 훨씬 쉽게 , 보다 선명하고 보다 다양한 색채로 펼쳐 보여준다 .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무엇이 진실인지 , 무엇이 정의인지 확언할 수 없다 . 나의 거짓말과 당신의 거짓말 , 그 사이에 진실은 다만 아련하고 희미하게 존재할 뿐이다 .
인생도 진실도 , 단순하지 않다 . 어떤 상황 , 어떤 사건에도 사람들 저마다의 절박하고 필연적인 입장이 있다 . 그것이 진실을 가린다 . 그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 우리는 어떤 판단도 할 수 없는 게 옳다 . 그래서 선 good 도 없고 악 bad 도 없다 하는 것이다 . 그런데 우리나라 국민들 일부는 참으로 미안하고 민망하게도 , 너무나 단순하다 . 자신이 아는 게 전부라고 믿는다 . 자신과 자신의 편은 선하고 정의롭고 남과 적은 악하고 불의하다고 맹신한다 . 그 결과 광우뻥 사건 , 세월호 사건 , 거짓 불법 탄핵이 가능했다 . 북핵이 아니라 사드 때문에 죽을 거라는 어리석음도 , 친일이란 지독한 프레임도 ,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도 , 시대상황에 대한 이해 없는 독재에 대한 오해도 , 자국 대통령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모독과 음해와 끝없이 잔혹한 고문도 . 동맹국의 대통령을 참수하는 행사에 대한 열광과 주적에 대한 찬양과 그의 화형식에 대한 반대도 , 그리고 이 모든 조국의 위기를 방관 조장하는 무리에 대한 환호까지 .. 다수의 국민들은 이 모든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 오로지 선동 당한 대로 , 거짓 언론이 떠든 대로 , 선과 악을 제멋대로 둘로 나누고 , 그 아래 숨겨지고 감춰진 사실은 도무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 사람이 어찌 그리도 심플하고 단순할 수 있는 것일까 .
아무리 비루한 삶조차 인정 ( 人之常情 ) 으로 용서하고 보듬는 게 사람의 길이어야 한다면 , 법은 법의 눈으로 사실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죄와 벌을 엄정하게 판결해야 한다 .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의 법은 인정만 앞세운 이들에 의해 죽었다 . 그들이 법을 조롱하고 조리돌림한 뒤 무참히 살해했다 . 이러한 참담한 사실에 대한 무관심이 우리의 가장 지독한 병이다 . 인간의 단순성과 다중성에 대한 몰이해가 가장 큰 죄다 . 무지가 가장 깊은 악이다 . 이 모든 것이 대한민국 호를 침몰시키는 중이다 .
소설에서는 비록 그것이 연민의 시선일지라도 잔혹한 삶의 구조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 . 하지만 영화에서는 희망을 남겨준다 . 인간에 대한 믿음 . 인간에 대한 희망 . 나는 그것이 서른다섯이란 젊은 나이에 자살한 소설가 ,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와 오래오래 살면서 훌륭한 작품을 남겨 세계적 거장으로 이름을 남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 나도 대한민국의 오늘을 비관하지만은 않는다 . 인간은 때로 어리석지만 , 밟아도 죽여도 , 무지와 두려움 속에서 끝내는 오뚜기처럼 바르게 일어서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
p.s. 추석 기간 중 심플하면서도 삐딱한 친지들과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 유튜브에서 [ 라쇼몽 ] 이라도 같이 보면 좋으련만 , 그렇게라도 세상을 보는 스펙트럼을 넓혀주는 것도 그들의 무지를 깨우는 한 방법이겠으나 . 깨몽 ,, 고스톱이 더 재미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글: 작가 김규나
라쇼몽 1 부 https://www.youtube.com/watch?v=FTUyyJQFz6c&t=2308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