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산(修理山) 산행기> ~~내가 걸어간 곳에 나의 발자국이 행복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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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얼마나 좋아하세요? 산과 친하고 싶지 않으세요?”
“예! 좋아하지요. 친하고도 싶고요.”

수리산은 안양과 군포, 그리고 안산에 걸쳐 있는 산이에요. 산림청에서 정식으로 인정한 한국의 100대 명산(名山)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인근의 광교산, 불암산, 검단산 등과 더불어 수도권 인기명산 100에는 이름을 올리는 인기 있는 산이랍니다. 알아볼 겸 포털을 검색해보니,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중 나는 대략 37개의 산을 올랐거나 둘레길을 걸었더라고요. 허락하는 한 꼭 가야한다는 법은 없고 백두대간을 꼭 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지만, 무릎관절이 아직 유용하고 시간과 여건이 구비되는 한 가야할 곳은 가고 남길 이유가 있으면 내 나름의 산행의 기록도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안양역에 내려 바라본 광장에 햇살은 가을을 보내기가 아쉬운 모양입니다. 가을 등산복으로 환복 한 나그네의 얼굴에 맺히는 땀은 지나는 계절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닮았습니다. 진한 아쉬움은 그리움의 언덕을 낳습니다. 무심코 지나간 세월 속에서 추억의 실체를 찾는 것보다는 지금 내가 경험하고 부대끼는 생활 속에서 자아의 존재를 깨달아가는 믿음도 변주(變奏)가 심한 삶을 살아가는 한 방법이 되겠지요. 나 홀로 산행을 주로 하는 편이지만 때로는 의미 있는 분들과 함께 동행 하는 산행도 편안하고 코스 좋은 산을 찾는 행복한 일 중 하나일 것입니다.

온라인 매체를 운영하는 언론 선배와의 수리산행은 엄청 큰 교회인 은혜와 진리교회를 지척에 둔, 만안구에 위치한 높이 약 20m의 충혼탑에서 호국영령들의 넋을 위무하는 기도에서 발자취가 시작되었습니다(충혼탑으로 올라가는 235계단은 덤이었죠). 해병 2기로 6.25 참전용사이셨던 아버님의 군복 입은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잠시 숙연해지는 분위기에 콧등에 맺힌 이슬은 떨어질 자리를 몰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전문 사진작가이기도 한 선배는 초점을 잡지 못해 휴대폰에서 사진 한 장 제대로 건지지 못하는 후배가 못내 안쓰러워 능숙한 솜씨로 고화질 고퀄리티의 사진을 등반 내내 알차게 건져주었습니다. 같은 휴대폰으로 찍었는데 확연하게 차이나는 사진의 질적 차이에 감탄할 사이도 없이 발걸음은 평탄한 양탄자 같은 등산로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등산할 때 가능한 하지 않으려는 것이 콘크리트나 아스팔트길을 걷는다거나 올라간 곳으로 다시 내려오는 것이에요. 누구나 그럴 거예요. 일상에서도 자잘한 변화를 위해 조금씩 삶의 포인트를 바꾸는 것처럼 등산할 때 가능한 다른 미학을 추구하는 건 인지상정이니까요.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이 인식하였던 산줄기를 체계화시킨 신경준의 [산경표]는 하나의 대간(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이로부터 가지 친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산줄기의 특징은 모두 강을 기준으로 한 분수산맥으로 그 이름도 대부분 강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중 수리산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갈라진 한남금북정맥으로 안성의 칠장산(七長山)에서 시작되어 서북쪽 김포 문수산(文殊山)에 이르는 산줄기의 가운데에 위치하죠.

한남금북정맥에 속하는 산들의 현재의 이름은 아래와 같다고 해요. 칠장산·도덕산(道德山)·국사봉(國師峰)·상봉·달기봉·무너미고개·함박산(함朴山)·학고개·부아산(負兒山)·메주고개·할미성·응봉(鷹峰)·형제봉·광교산·백운산(白雲山)·수리산·소래산·성주산(聖住山)·철마산(鐵馬山)·계양산(桂陽山)·가현산·필봉산(筆峰山)·학운산(鶴雲山)·것고개·문수산(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참조) 생각해보니 한남금북정맥을 관통하는 이 많은 산들 중 찾은 산이 일곱 고지에 불과하네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덜 남은 필부필부(匹夫匹婦), 불러 줄 세상도 없는데 그나마 독야청청할 산에라도 더 많이 찾아야 하겠다며 걷는 발길에 가을의 햇살이 벙긋 웃어줍니다.

파랑하늘과 평탄하여 남도의 낮은 구릉을 연상시키는 등산로는 여타의 도시 근교 산에서 흔히 보는 인위성 대신 자연 그대로의 흙의 숨결을 전해줘 편안했습니다. 옥쉼터에서 잠시 옥돌도 밟고 옴파로스 같이 생긴 석탑에 등을 비비기도 하고 주위 평석에 누워 따듯하게 등도 지지고 싶었지만 사진에 담는 것으로 대신하고 걷습니다. 신기한 것은 최고봉인 태을봉(太乙峯)의 높이가 489m로 같은 한남정맥의 문수산이나 계양산보다 100m나 더 높은데 등산길은 일부 계단을 제외하고는 마치 둘레길을 걷는 듯한 느낌처럼 가파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리산에도 등반로에 따라 가파른 곳과 평탄한 곳이 공존한다는데 안양 충혼탑에서 오르는 등산길은 마치 어머니 품속에서 웃고 있는 아이의 숨길 같습니다.

관모봉 가는 길로 정상의 반쯤 올랐을까 [수리산안내도]에 ‘수리산의 명소 3곳’에 표기가 보입니다. 정상인 ‘태을봉(도가(道家)에서 따온 이름으로 고려 때부터 산신제를 올렸다고 해요.)’과 천주교 박해역사의 산증인으로 1839년 기해박해 대 순교한 최경환 성인과 순교자들을 기리는 ‘수리산 성지’, 그리고 미나리아제비과의 쌍떡잎식물이자 하얀 꽃술을 2월과 3월 사이에 만개시키는 한국토종 꽃 ‘변산바람꽃 쉼터’가 그 장소로 주민들과 천주교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고 합니다. 등산로에 듬성듬성 뿌리를 노출시키는 소나무 숲길에서 활짝 가슴을 펴고 심호흡하는 찰라, 관모봉과 병목안 시민공원 사이의 이정표를 돌아 올라가니 등산길에 펼쳐진 다양한 모습의 바위들이 나를 반깁니다.

관모봉과 태을봉, 병목안 시민공원으로 가는 이정표가 기다리는 곳에 이르기 전 펼쳐지는 다양한 형태의 바위들은 수리산의 선물인 것 같습니다. ‘징검다리 모양’의 바위길, 마치 광주에 있는 무등산 정상 주상절리를 닮은 ‘주상절리형 바위’, 칼날 바위와 자세히 보면 고대 오리엔트 신화의 괴물인 ‘스핑크스를 닮은 바위’ 등이 등산의 재미를 더해주는데 이런 걸 등산의 즐거움이라고 하면 적당한 수사일 겁니다. 스핑크스 바위는 옆에서 보면 너무나 흡사해서 당장이라도 내게 수수께끼를 던진 후 잡아먹을 것 같아 사진을 찍고 서둘러 자리를 피합니다. 그렇게 산에 오르는 사이사이 언론사 선배가 찍어준 고마운 사진에는 정성이 담뿍 담겨 흐뭇하게 웃는데 어느새 관모봉(官帽峯)의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며 산 아래로 확 트인 시야를 움켜쥐며 열린 눈에 생기를 불어넣어 줌은 물론이었죠. 관모봉은 해발 426m로 489m인 최고봉 태을봉과 451m인 슬기봉보다 낮으나 사방 조망을 가장 안정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라, 등산객들도 오래 머물며 안양과 군포는 물론 멀리 롯데타워까지 눈의 조리틀 속에 욕심껏 집어넣느라 분주합니다.

따듯한 햇살과 정상에 부는 바람의 유혹에 빠진(?) 선배가 이완된 신체를 말리기 위해 쉬는 사이 나의 발길은 분주히 약 75m 떨어진 수리산 최고봉인 태을봉으로 향합니다. 가는 길에 무수히 뻗어 있는 소나무의 뿌리는 발길 분주한 등산객에게, ‘천천히 가거라. 뭐가 급해서 이 아름다운 여성 산을 시끄럽게 하면서 뛰고 난리냐?’ 충고를 잊지 않습니다. 대부분 산의 헬기 착륙지는 정상과 가까운 평지에 만들어져 있는데 수리산의 헬기 착륙지는 최고봉인 태을봉의 표지와 나란히 어깨하고 있습니다. 표지석 근처에서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어 사서 한 입 베어 뭅니다. 달작 지근한 청량감, 몸에는 좋지 않을지 몰라도 단짠 음식으로부터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이정표대로 슬기봉으로 넘어가려는데 1.85km는 결코 가깝지 않습니다. 망설이는 사이 몸을 말끔하게 말린 선배로부터 ‘어여, 내려가서 박달시장 부쳐부쳐 부침개 노포(老鋪)에 들러 목을 축여야지?’ 한 마디에 하산을 서두릅니다.

수리산은 산세가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기운이 풍기는 산이지만 안양대학교 충혼탑이나 수리전 약수터에서 관모봉에 이르는 완만하고 평평한 등산로를 제외하면 난코스도 꽤나 많이 보유한 산이에요. 등정 코스는 관모봉~태을봉~슬기봉~수암봉(398m)을 돌아 안양시 최고의 시민공원인 병목안 시민공원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일반적으로 약 12km를 넘나드는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초보자들은 한 나절 정도 걸릴 수도 있는 코스라, 종주를 계획한다면 아침에 일찍 오르는 것이 좋아요. 종주 대신 병목안 시민공원 방향으로의 하산을 선택합니다. 여유 있게 산을 둘러보며 종주도 하고 3대 성지도 관찰하고 싶었으나 탁배기 한 사발에 음풍농월하는 언론인과의 대화도 중요한 일이었으니까요. 산을 오를 때의 완만한 등산로를 마다하고 사서 고생하듯이 선택한 태을봉에서 병목안 공원 캠핑장으로 바로 내려오는 코스는 이용이 적은 탓인지, 가팔라서인지 몇 번을 미끄러질 뻔한 위험성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2~30분가량 내려온 협곡에 백영 샘터가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식음수로 안양은물론 인근 시흥, 군포 등지에서 물통을 들고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데 수질기준의 안전성에 미달하여 폐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시려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샘터에 앉아 잠시 쉬며 시원한 물에 탁족(濯足)도 하고 세수도 한 후, 아주 긴 시간을 죽치고 앉아 ‘진주난봉가’를 불렀습니다. 그러기를 한참, 간신히 일어나 샘터로 연결된 너럭바위 몇 개를 밟고 계단 몇 개를 내려오니 곧바로 평탄하게 뚫린 등산로에는 적지 않은 위락 인파가 군데군데 자리하고 앉아 자연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눈에 들어오는 잘 조성된 석탑 두 쌍, 그랬군요! 저 탑이 바로 수리산의 제7경이라는 ‘병목안 산림욕장 석탑’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들어가는 목은 좁으나 안쪽은 깊고 넓다하여 병목안이라고 부르는 마을에 조성된 시민공원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거였어요. 능선 길고 숲이 짙은 골에는 잣나무와 굴참나무, 당단풍나무의 군락지도 얼핏 보였습니다.

계절의 어머니인 가을을 보내기 싫은 가족 단위의 캠핑족들이 시민공원의 캠핑장을 가득 메우고 여기저기에서 숯불을 피우는 광경과 연인들끼리 오순도순 앉아 정담(情談)을 나누는 풍경은 언제보아도 마냥 좋았어요. 자연학습장의 식물원에는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고, 중앙광장 좌우로 위치한 인공폭포, 돌과 꽃 정원, 팔각정자, 잔디광장, 어린이놀이터와 체력단련장 옆 배드민턴장에서 나오는 함성소리는 캠핑장 숯불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만남의 다리 앞에서 스틱을 접습니다. 동시에 자연학습장을 나오는 구름다리 위에서 곁에서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는 철쭉군락의 발랄한 애교에 화답합니다. 봄이 되면 화사한 밝음으로 도시의 활력에 견인차가 되겠지요. 안양에서 정론직필의 바른 길을 모색하고 있는 선배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내려왔으면 택시 타고 박달시장 ’부쳐부쳐 부침개‘로 빨리 달려오소.’ ‘니에, 감히 누구의 하명인데요. 기다렸던 부름이지요. 그럼요, 어서 달려갑지요.’

완화된 거리두기 1단계가 활기찬 시장의 오후를 베어 먹는 사이 발걸음은 어느새 부쳐부쳐 부침개라는 노포의 문턱을 넘어, 3,000원 하는 탁배기와 6,000원 하는 모듬전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안양에서 마지막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사는 곳으로 돌아오는 길이 따뜻했음은 물론입니다.

작가  박철민 칼럼 리스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