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 한쪽에 농수로가 흐른다. 황톳물이 한껏 불어났기 때문인지 모내기철이 끝나서인지, 오늘 아침에 보니 바닥이 드러나도록 물이 빠져있었다. 그런데 파닥파닥파닥, 소리가 들리는 곳을 내려다 보니. 내 팔뚝만한 물고기가 옆으로 누운 채 진흙 바닥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수위는 낮고 숨은 차고, 물고기는 파닥이다 쉬고 파닥이다 쉬기를 반복했다. 마음 같아서야 펜스를 뛰어넘어 2~3미터 아래 바닥으로 뛰어내려가 건져주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쪽이 아니야,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시 쭈그리고 앉아 한 생명의 사투를 지켜보던 나는 그나마 웅덩이가 깊은 곳에 녀석이 다다른 것을 보고서야 안도하며 일어섰다.
하지만 오래 걷지 못하고,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물 빠진 농수로 바닥 한 가운데, 왜가리가 앉아 있었다. 나는 조금 전 물웅덩이를 찾아낸 녀석이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그쪽이 아니고 이쪽으로 온들,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간들, 녀석은 오래 살아있지 못할 것이다. 왜가리의 밥이 되든 한 낮의 뜨거운 햇볕에 말라죽든 할 테니까. 실은 그 녀석 뿐이 아니었다. 웅덩이마다 작은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헤엄치며 저마다 길을 모색하고 있었고 또 다른 왜가리와 백로들, 먹이를 찾아 하늘을 날고 있었다. 물고기가 살길 바라면서도 왜가리가 배 부르길 바라는 모순.
하긴, 삶이란 그런 것이다. 죽음은 생을 먹여 살리고, 생은 죽음으로 향해 치달으며, 바로 그 죽음 한가운데서 생은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나를 먹이고 살리는 것이 무언가의 죽음이듯, 다만 내 눈에 보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 그러므로 죽음 앞에 놓인 고통이 눈에 보인다고 호들갑 떨 일도 없고, 안 보인다고 잊고 살 일도 아니다.
<이 귤나무 기억하니. 꽃도 열매도 안 생기지만 너라고 생각하고 매일 물 주고 있어. 그래도 애벌레가 이 잎을 먹고 자랐단다. 나중엔 나비가 됐지. 꼬물꼬물하더니 파란 무늬의 나비가 됐어. 이 나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고 있어.>
나도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고 있을까, 어제 글에 붙였던 동영상 <태풍이 지나가고>에 나온 한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죽고 사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생과 죽음이 갖는 순환과 모순을 피할 수 없다면, 오후에 뜨거운 햇볕 아래 타죽을지라도, 왜가라의 아침 식사가 되어 한 입에 꿀꺽 삼켜질지라도,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은 최선을 다해 진실하게 살 것, 조금 더 깊은 웅덩이를 찾아 몸부림 치던 물고기처럼 거짓없이 치열하게 내 삶을 위해 파닥거릴 것, 잎이 갉아먹혀 아플지언정, 내 살을 먹고 하늘을 날게 될 푸른 나비의 꿈을 함께 꾸며 오늘을 감사할 것!
글: 김규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