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비 시해와 여우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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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원=박상후 칼럼니스트) 1882년 임오군란은 일본식 신식 군대 별기군에 비해 대우를 받지 못하던 구식 군대가 일으킨 구데타였다.

당시 민비는 전국의 무당들을 금강산에 보내 1만2천봉 봉우리 마다 쌀 삼백석에 수백냥씩 제물로 바치며 자신의 어린 아들 순종의 안녕을 위한 굿판을 거하게 벌이고 있을 때다.

이러한때 안그래도 13개월간 급여를 받지 못해 불만이 팽배해 있던 구식 군대에게 한 달치 급여가 지급되었는데, 그것 조차도 절반 이상이 모래가 섞인 쌀이었다.

이에 구식 군대인 무위영등 군졸들이 격분해 선혜청 담당 관리를 죽이고 민비의 척족인 민겸호 선혜청 당상의 집으로 쳐들어 갔다.

당시 군졸들의 구호는 “여우년을 죽여라”였다. 여우년은 말할 것도 없이 민비다. 이 난을 피해 민비는 충주로 도망쳤고, 이 틈을 타 민비의 정적 대원권은 고종을 겁박해 민비를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상까지 치르게 한다.

고종은 이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의 파병을 요청했고, 이 때 부터 일본등 열강들은 앞다투어 조선에 본격적인 파병을 하게 된다.

이렇게 조선에 출병한 원세개는 말을 타고 어전까지 들어가는 만행을 자행하고, 결국 대원군을 잡아다 청나라로 끌고가 연금한다. 그리고 다시 민비는 궁궐로 돌아와 권력을 장악한다.

그로부터 13년후 민비는 대원군과 밀약을 맺은 일본인들에 의해 궁궐에서 죽임을 당한다. 이때 일본인 낭인들의 민비 암살 계획의 암호가 ‘여우사냥’이었다.

우리 역사책에서는 국모가 일본인 낭인들에 의해 시해당한데 분노한 백성들이 들불처럼 의병을 일으켰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이는 명백한 거짓이다.

그 당시 백성들에게 민비는 황후도 왕비도 아닌 ‘그 여우년’으로 불리었다. 그런 민비가 죽었는데 일부 양반들은 몰라도 밑바닥 민심까지 동요할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사단이 난 건 민비가 죽은 후 3개월뒤 민비 제거로 권력을 잡은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개화를 위해 불시에 단행한 ‘단발령’ 때문이었다.

고종과 대신들이 상투를 자른 후, 요즘 같으면 가두 불심검문을 통해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강제적으로 상투를 자르게 한 것이 민심을 자극한 것이었다.

주자학의 우등생, 동방의 예의지국에 단발령이라니….
此頭可斷 此髮不可斷 (차두가단 차발불가단)
“머리는 잘라도 머리카락은 못자른다”란 말이 나온게 이 때다.

왕비가 시해당해도 덤덤하던 민심이 단발령으로 인해 폭발한 것이다.

요즘 이병헌 주연으로 조선말 의병을 주제로 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참에 의병의 허실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