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민의 풍찬노숙] 그릇의 哲學

3264

“마음이란 창고”에 자비를 담고 사는 자를 君子라고 하지요.

이와 다르게, “집안에 있는 창고”에 재물을 담고 사는 자를 小人輩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옛 성현들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군자나 대인은 아니어도 소인배가 되지는 않으려 노력하셨습니다.

기실 나 또한 大人으로 살아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나, 경제와 친하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 그저 세상 모든 것을 달관한 것처럼 살아가려 애쓰고 있습니다.

허나 삶에는 항상 다양성의 미학이 공존하기 마련이지요. 不惑의 나이를 넘긴 후의 길은, 선택이 아닌 運命인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지요. 스스로 항상 준비하고 나아 갈 용기를 갖고 있다는 믿음, 그것이 현실을 이겨내는 룸펜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지고지순한 가치입니다.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모짜르트는 어머니의 영전에, ‘피아노 소나타 A단조’의 슬프면서도 애련한 음악을 헌사 했습니다. 살아 못한 자식의 도리를 요절하기 전에 한 것입니다.

유자儒子들의 도덕적 삶을 헤아리진 않겠습니다. 허나 단 한 번뿐인 허허로운 삶, 부끄럽거나 쪽팔리게 살지는 말아야지요.

살아야 한다는 당위當爲가 모든 것을 합리화해주지는 않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정상에 올랐으면 내려갈 일밖에 더 남은 일이 없습니다.

세상을 미혹시킬 거대한 가치는 사실 없습니다. 태어난 것이 내 의지가 아니었듯이, 살아가기 위한 내 몸부림에도 스스로의 의지가 작용하는 기능은 그닥 많지 않습니다. 하여 스스로를 밝히는 “자아의 발현”이 더욱 중요한 것이지요.

세상은 타인을 불편하게 하지 않을 정도로 설 수 있는 “나”의 완성이면 충분합니다. 오늘 그런 나를 버려 물질과 관능의 노예가 될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흠결까지도 흡수하여 깨끗하고 착하게 살며 스스로 빛을 발하는 자아를 발견하며 살 것인가?

선택은 순간이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결정되는 사회는? 조화調和의 사회와 분열分列의 사회 두 사회일 뿐입니다.

대저 조선시대의 상소문을 인용하여 청와대를 노크하는 眞人(?)들의 작업도 그만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의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는 것, 觀種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저는 졸업하지는 않았지만 역사도 전공했었습니다. 그런 연고로 이번 기회에 시대를 고찰하지요. 조선왕조를 보면 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왕들 모두 사대부들 눈치 보고 살았습니다. 자기들만의 리그를 형성했던 사대부들에게 왕이라는 존재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맏형 정도의 위치였지요.

지금의 대통령들이 오히려 무소불위(레임덕 이전까지)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권력을 고루 나누는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를 권하고 싶습니다. 51 대 49의 제로섬 게임이 낳는 폐해는 위선 비겁 기회주의자들만 양산하게 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되는 것이니까요.

도대체 이 작은 나라가 다시 지역별로 분열되어 아귀다툼하는 형국을 언제까지 지속할 예정인가요? 그리고 왜 특정지역 분들은 거의 대부분 한 목소리만 가지고 사시는 건가요?

色界나 無色界의 경지가 아닌 욕계慾界에 사는 무리들에게 감히 聖賢이나 군자를 말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마음의 창고와 집안의 창고’가 갖는 比重이 엇비슷해지길 희망할 따름입니다.

그래야 언텍트 시대의 거리둠이 영원히 고착되어 서로 얼굴 바라보고 웃는 일이 없어지는 불행을, 그나마 막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래야 정녕 사람 사는 세상, 대동세계가 완성될 것 같기 때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