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원=정인태 기자) TV로 보아오던 프라하는 고성이 있고, 강이 흐르는 낭만에 찬 도시였다. 퇴폐적 허무주의로 낙인찍힌 카프카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쓴 밀란 쿤테라를 품은 도시라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었다. 어줍짢은 상식을 바탕으로 프라하에 가면 중세 유럽의 공기를 맘껏 마셔볼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늠도 해보았다.
그러나 프라하 늦은 밤의 어둠은 그 어느 장소보다 더 농밀하다. 낭만의 그림자 속에 드리운 농밀한 어둠은 건물 벽에 아로새겨진 세월의 흔적과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생채기에서 비롯한다. 서울의 봄을 견뎌낸 우리이기에 ‘프라하의 봄’의 기억은 더 각별하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다시 붉은 태양이 뜨고 세계 그 어느 곳보다 맑고 푸른 프라하의 하늘이 열렸다.
# 프라하는 역사교과서이자 예술품이다
블타바강(독일어로 몰다우강) 동쪽 언덕에 구시가는 사진으로 보았던 프라하의 아름다움이 집약된 관광 1번지다. 아침의 푸른 하늘 아래 구시청사, 틴 성모 교회, 성 미쿨라셰 교회, 골스킨스키 궁전으로 둘러싸인 구시가광장이 있다. 우아한 르네상스, 화려한 바로크, 아기자기한 로코코, 섬세한 고딕 양식 등 학창시절 미술시간에 들어봤던 무수한 건축 양식들이 이곳에 하나같이 모여 있다.
프라하의 심장이라 불리는 구시가광장은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공화국 몰락 선언 후 프라하의 봄, 벨벳혁명 등 역사적인 사건들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다. 구시가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얀 후스 동상이다. 얀 후스는 14세기 부패한 성당을 맹렬히 비판했다가 독일에서 화형당한 종교개혁자다.
구시가광장에서 틴 성모 교회도 빼놓을 수 없다. 틴 성모 교회는 성 비투스 대성당과 함께 프라하를 대표하는 종교건축물로 손꼽힌다. 1365년 개축돼 후스파의 거점으로 사용됐다. 검은색 지붕으로 뒤덮인 뾰족한 탑이 인상적인데, 밤에는 푸른 조명을 받아 더욱 엄숙한 풍경을 자아낸다.
매시 정각이 되면 광장의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구시청사의 시계탑을 바라본다. 사람들의 탄성과 함께 해골인형이 종을 치자 시계의 작은 창문이 열리면서 예수의 12사도 인형이 차례로 나온다. 꽤 볼만한 광경이다. 시계가 달려있는 65층 높이의 탑 전망대에 오르면 한눈에 들어오는 구시가전경도 매력적이다.
구시가광장에서 벗어나 골목을 조금만 지나면 프라하에서 가장 번화가인 바츨라프 광장에 도달한다. 구시가광장과 함께 오랜 시간 시민시위나 공공집회의 장소로 이용된 이 광장은 여전히 차와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곳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한데 모여 헌화를 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도 있다.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이 무력으로 밀고 들어오자 분신자살해 공산주의에 저항한 대학생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의 제단이다.
어둠이 가고 빛이 오듯이 그 당시의 붉은 선혈은 이미 지워지고, 총탄 자욱도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비록 무고한 생명은 사라지고 없지만, 여전히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인파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 어둠속에 새겨진 봄의 기억
카렐교. 프라하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도 그 이름만큼은 익숙한 곳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영화 `프라하의 봄`에서 여주인공 테레사는 이 다리 밑에서 잿빛 블타바 강물을 바라보며 “프라하를 떠나고 싶다”고 통곡하기도 했다.
카렐교는 동구권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길이 520m에 보행자 전용이다. 이 다리는 기독교 성인 33인의 조각상으로 유명하다. 1357년 칼레르 4세의 명령에 의해 건설하기 시작한 이 다리에는 완공 이후 200년간 나무로 만든 17세기 예수 수난 십자가가 유일한 장식품이었다.
그러다 로마 산탄젤로 성에 있는 베르니니의 조각에서 힌트를 얻어 1683년부터 프라하의 기독교 순교 성자인 성 요한 네포무크의 것을 시작으로 기독교 성인 33인의 조각상을 다리 난간에 세웠다. 단, 다리에 있는 조각상들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라피다리움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카렐교는 항상 거리 예술가들로 북적거린다. 기타를 치는 사람,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사람, 팬터마임을 보여주는 사람 등. 또 다리 양간 좌판에서는 인형, 엽서, 그림, 기념품 등을 판매한다.
하지만 카렐교 위에서 멀리 프라하성과 블타바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바로 가까이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함은 어느새 뇌리에서 사라지고 만다.
작은 레고속 도시를 바라보는 기분이 들다가도 어느새 웅장한 건물의 외벽이 성큼 눈앞에 나타나며 낯선 감정이 느껴지는 것이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이야 이루 말할 것도 없고, 강물에 비치는 어른거리는 노을빛은 프라하 시내를 빨갛게 물들이며 시각적 환상을 자아낸다.
마치 원근법이 극대화를 이루듯 잔잔하고 고고한 프라하의 고성과 건축물들은 활동적이면서도 유쾌한 다리 위 예술가들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다리 난간에 걸터앉아 유유히 흘러가는 블타바강의 바로 위에서 어둠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마침내 해가 지고 다시 진한 어둠이 찾아들면 프라하 시내는 희뿌연 수은 가로등의 불빛에 취하고 만다. 아픈 도시의 역사와 그 역사를 또렷하게 새겨 놓은 도시의 모습은 그 과거의 휘둘리지 않겠지만, 잊을 수는 없다는 소리 없는 외침으로 가득하다.
이 무거운 어둠 속에서도 해는 다시 뜨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프라하의 공기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 역사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서서
프라하는 중세의 기품과 미려한 외관으로 고즈넉한 자태를 뽐내지만 치열했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곳이기도 하다. 1956년 소련 내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있은 후에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외면한 채 노보트니 정권의 보수정책이 계속됐다.
1960년대 이에 반발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지식층이 중심이 돼 민주ㆍ자유화의 실현을 위한 조직적인 운동을 펴기 시작했는데, 1968년 당시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이르러 매일같이 수만 명의 인파가 집회를 연 곳이 바로 신시가지의 중심, 바츨라프 광장이다. 그리고 정부의 진압에 분노, 분신자살을 했던 얀 팔라크의 기념 화단도 이곳에 마련돼 있다.
`프라하의 봄`으로 체코인들은 동구권 국가 가운데 민족적 자긍심이 가장 강한 민족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러한 자존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1989년 공산주의를 몰락시키고 만다. 오늘도 블타바 강 건너의 프라하 성은 요동쳤던 체코의 현대사를 굽어보며, 체코인들의 자긍심을 소리 없이 대변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원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