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민의 삶과 맥주] 맥주의 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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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원=정성민 칼럼니스트) 늘 주머니가 가볍던 대학시절 주문한 생맥주에 거품이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많아 보이면 친구들과 나는 거품이 반이라느니 돈을 너무 쉽게 벌려고 하신다느니 하면서 그 호프집 사장님을 안주로 씹곤 했다.

그 시절에는 맥주의 풍미나 아로마 같은 데 관심을 두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고, 시원하게 목을 넘어가 알딸딸하게 취하는 것에만 신경 썼던 것 같다. 그런데 맥주에 거품은 왜 생기고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오늘은 그에 대한 이야기다.

맥주를 잔에 따르면 윗부분에 하얗고 두툼한 거품이 덮여 우리의 식욕을 자극하는데 이것을 업계용어로 헤드라고 부른다. 물론 카0나 0이트, 테0 같은 대량생산 공장맥주의 거품은 잔에 따르자마자 사라지기도 하지만….

맥주의 헤드는 보리 몰트에서 유래된 단백질이 이산화탄소와 함께 위로 올라오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잔 윗부분으로 올라온 단백질은 이산화탄소 거품을 둘러싸 막을 형성하고 맥주의 덮개 역할을 하여 맥주의 맛과 향을 지켜준다.

물론 그 밖에도 분자수준에서 발생하는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핵심은 보리에 들어있는 단백질이라고 보면 된다. 쌀이나 옥수수, 설탕 같은 첨가물이 많이 들어간 맥주의 헤드가 약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결국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적절한 원료와 관계가 있다.

그런데 이 거품이란 게 왜 중요할까? 혹시 맥주 거품만 맛을 본 적이 있는지, 그랬다면 그 아래에 출렁이는 맥주보다 그 맛이 훨씬 쓰다는 걸 느꼈을 것이다. 단백질이 위로 올라오면 홉에서 나온 쓴 성분과 결합하는데 그것이 거품의 톡 쏘는 쓴맛을 내기 때문이다. 홉에는 쓴 성분과 함께 다량의 아로마도 포함되어 있어 맥주의 아로마를 한층 증폭시켜주는 경우가 많다.

더 나아가 우리가 맥주를 맛 볼 때는(다른 무엇을 맛 볼 때도 마찬가지지만) 처음에는 대개 코를 사용한다. 우리가 인지하는 맛이 대부분 우리의 후각기관을 통해서 먼저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적당한 거품이 덮인 맥주에는 아로마가 많이 남아있고 아로마가 많은 맥주에서는 다양한 풍미가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초스피드 근대화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며 우리 사회에 변화에 대한 요구가 다가오고 있다. 어떤 분야에는 품질과 감성이라는 형태로 다른 분야에는 공정성과 도덕성이라는 형태로 그 요구는 점점 커지고 있다. 불과 20년 만에 우리가 사 입는 옷이 많이 변했고, 우리가 먹는 음식의 다양성이 높아졌으며 식품 의약품의 안전기준, 국가복지의 적용범위, 육아와 교육의 방식, 사회적 약자의 권리 재정립 등 모든 것이 그에 맞춰 변해가고 있다.

물론 어떤 이들의 눈에는 아직 많이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변화는 오고 있으며 그런 시대적 요구를 국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구현하지 못하면 정권조차도 끌어내려지는 것을 우리는 얼마 전 목격했다. 아주 작아 보이는 것에 요구된 변화가 사실상 그 물밑에 훨씬 거대한 흐름을 반영하고 있음을 때때로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맥주의 거품도 그런 것이 아닐까. 어찌 보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처럼 보이는 작은 부분이지만 맥주거품의 양과 질은 우리나라의 음주문화 그리고 한국 사람들의 삶의 여유와 품격을 나타내는 숨겨진 지표이기도 한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의 그 모든 변화와 마찬가지로 맥주 한 잔에도 시원한 목넘김을 넘어 다양한 풍미와 아로마와 스토리가 담는 시대가 눈앞에 있다고 나는 느낀다.

젊었을 때 맛본 맥주가 이러이러한 것이었다고 해서 당신에게 평생 맥주가 그 의미로 고정될 필요는 없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한 걸음 앞서도 가 보자. 이런 것이 술을 즐기고 삶을 즐기는 사람들의 어드밴티지가 아닐까.

자 이제 맥주에 거품이 있다고 화내지 말자. 위에서 살펴본 대로 헤드는 우리가 맥주를 즐기는 데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서 팁을 드리자면 잔에 맥주를 가장 잘 따르는 방법은 손가락 굵기 두 개 정도의 거품이 위에 얹어진 만큼 따르는 것이다.

잘 만든 수제맥주는 물론이고 편의점에서 사온 대량생산 캔 맥주라고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따서 바로 입에 가져가기보다 (캔 윗부분은 보기보다 상당히 더럽다.) 가능하면 투명한 잔에 따르자. 잔에 따르는 속도와 높이를 조절해 적당한 헤드를 만들어 보자. 그리고 마시기 전에 입안에 담고 풍미와 아로마를 느껴보는 데 시간을 들이자. 맥주거품이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맥주 거품의 양과 질을 결정하는 다른 요소들

▴맥주 안에 녹아있는 천연오일은 거품형성에 영향을 준다. 커피나 코코넛 같은 첨가물은 맥주 안에 오일을 많이 남기기 때문에 그런 첨가물이 많이 들어간 맥주는 거품의 양이 적은 편이다.

▴알코올과 산은 단백질 화합물이 거품을 형성하는 능력을 제한하는 요소다. 그래서 알코올 도수가 높은 맥주나 사워에일 같은 맥주에는 거품이 적은 경우가 많다.

▴립스틱, 입술보호제에 들어있는 왁스성분은 맥주 거품의 지속력을 감소시킨다.

▴기름진 음식도 립스틱의 왁스 같은 역할을 한다.

▴질소가스를 첨가한 맥주에는 풍부하고 부드러운 헤드가 형성된다. 질소는 이산화탄소에 비해 물에 용해되는 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따를 때 맥주에서 쉽게 빠져나와 미세한 거품을 많이 형성한다.

(본 칼럼은 서울브루어리 브루마스터 조쉬와 함께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장성민 칼럼니스트 

장성민칼럼니스트: 1975년생 약사 서울브루어리 부대표   2016년 여행에세이 ‘이렇게 일만 하다가는’ 출간 2017년 아무튼 시리즈 3권 ‘아무튼 게스트하우스’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