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서 온 공무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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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산업부와 과기부 공무원들이 한국으로 연수를 받으러 왔다. 그들은 지난 달 입국하여 코이카(KOICA)에서 2주일 연수를 받았다. 미래자원연구원(원장 유시생) 주최로 신도림역 회의실에서 교육을 받았고 연수를 마친 후 수료식도 했다. 인원은 총 18명이었다. 주한이라크 대사도 참여했고 서울대학교 원자력정책센터
수석연구위원 박상덕 박사와 미래자원연구원 이헌규 소장도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바그다드에서 공무원들이 한국에 온 까닭은 에너지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무궁무진한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이라크는 중동에서도 손꼽히는 산유국이다. 같은 중동이지만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요르단에 사담 후세인 대통령 시절 무료로 원유를 줄 만큼 풍요로운 나라였다. 1970년대에 이라크는 번영을 구가했다.

사실상 이라크는 수메르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일으킨 땅이다. 세계 2위 석유 매장량도 자랑한다. 그러나 1980년 이란ㆍ이라크 전쟁과 그 이후 40년 넘게 여러 전쟁을 치르고 정치적, 종교적 소용돌이에 놓여 경제가 몰락했다. 1980년 이전에는 대한민국과 비교 불가의 경제대국이던 이라크, 오늘날 전기 사정도 열악하다. 하루 2시간 전기가 들어오고 2시간 제한 송전을 하는 식이다. 한여름 55도까지 올라가는 나라에서 말이다.

한국인으로서 고마운 나라가 바로 이라크이다. 1970년대 중동 건설붐이 일어났을 때 이라크에서 현대건설이 외화를 많이 벌어들였다. 항구가 있는 바스라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이라크 사람들은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나라에서 온 ‘코리언’을 안쓰럽게 여겼고 친절하게 대했다. 그 시절 이라크에서 근무한 한국인 노동자들의 증언 중 미담이 많다.

국방부에 연수를 왔었던 이라크 장교들과 건설 노동자 출신 70대 신사와 지하철을 같이 탄 적 있다. 70대 초반쯤 돼 보이는 한국인 신사가 “혹시 이라크에서 오신 분들이냐?”고 물었다. “바그다드에서 온 장교들”이라고 하자 갑자기 이라크 사람들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영문을 몰라 하는 우리들에게 그 신사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라크는 내 인생을 바꾼 나라입니다”

그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TV에서 이라크가 어느 나라와 스포츠 경기를 하면 무조건 이라크를 응원합니다. 대한민국도 저도 가난했던 시절 이라크에 건설 노동자로 갔습니다. 그때 돈을 벌어 가족들이 굶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우리 집안이 일어섰답니다. 이라크는 은인입니다. 내 청춘을 이라크 사막에서 보냈지요.”

항구도시 바스라에서 온 어느 해군 장교 가족과 만날 때 식사 대접도 받았다. 역시 70대 초반의 신사가 이라크 사람들을 보자 “꼭 한번 대접하겠다”는 말을 했다. 알고보니 1970년대에 결혼식만 올리고 이라크로 떠난 사람이었다. 열사의 중동 건설 세대였다. 그는 당시 이라크의 항구 도시 바스라 주민들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우리 노동자들을 무시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대해줬다. 가족들을 모두 떼어놓고 이라크에서 일을 할 때 바스라 주민들의 환대와 격려가 눈물겹게 고마웠다”는 말도 들려주며 감동의 눈물을 훔쳤다.

인류 4대 문명 중 핵심이었던 이라크는 예사로운 나라가 아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소주, 맥주, 빵을 모두 발명했다. 한국인들이 즐기는 음식 문화가 탄생된 곳이다. 그리고 현대건설이 이라크에서 달러를 벌어들여 가난을 벗어나고 국가도 발전할 수 있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라크는 전쟁 등으로 무너져 내렸다.

유머 감각이 뛰어난 이라크 사람들은 성격이 쾌활하다. 그들은 알 아바스 왕조 시절 세계 최고의 문화와 학문을 꽃피웠다. 인구 100만 명도 넘는 명품 도시가 바그다드였다. 바그다드의 뜻이 ‘신의 선물’이란다. 그들은 화려한 영광의 시대와 고통을 모두 경험했다. 한국도 그랬다. 분명한 것은 두 나라가 가진 장점이다. 그들에게 풍부한 원유가 있고 한국은 뛰어난 기술이 있다. 이제 서로 손을 맞잡고 함께 번영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글 사진: 체리 이연실/ 칼럼니스트